유학을 준비할 때 ' 너는 빵을 좋아하니 미국 가면 잘살겠다'는 말을 엄마가 하곤 했다. 그러나 미국에 오고 나서 알았다. 나는 완전 한식 파였다는 것을. 일단 미국빵은 한국빵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파는 식빵은 뻣뻣하고 딱딱하고 때론 시기도 하다. 더 나아가 다른 종류의 빵들은 소름 끼치게 달거나 짜거나 느끼한 빵들 뿐이다. 그렇게 빵순이였던 나는 빵을 멀리하고 자연스럽게 나는 집에서 집밥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만든 아구찜
그러나 한국음식을 사 먹으려면 차를 타고 20-30분은 나가야 하고 배달도 안 되는 미국에선 많은 이민지들이 요리가 는다고들 한다. 다들 이민오신 주부들은 미국 와서 안 해본 음식이 없다고들 했다. 내가 먹고 싶은 요리를 파는 곳도 드물고 운 좋게 찾아도 대부분 비싸기만 하지 맛있게 하는 곳도 없었다. 정말 엘레이에 살지 않으면 정말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기가 힘들다. 그러니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스스로 해 먹을 수밖에. 그렇게 나도 요리책을 보고 인터넷을 보아가며 요리를 시작했다.
거기다 맛있는 걸 먹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행복인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요리실력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남편은 간도 완벽하게 맞아야 하고 재료의 식감도 살아야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미식가였다. 음식을 먹어보면 여기엔 뭐가 들어갔네 어떤 소스를 넣었네를 아는 사람이다. " 음식에서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하는 것이옵니다'라는 유명한 드라마 장금이를 연상하게 하는 인물이다. 늘 신혼땐 "이건 좀 싱겁다. 이건 좀 덜 익었네. 여긴 마늘이 들어가면 더 맛있겠다."를 남발하며 지적질을 해대는 남편과 살면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지금도 남편은 나의 요리실력의 반은 자신의 적절한 "당근과 책찍질"덕분이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거기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시골밥상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고사리 무침, 고구마 줄기 무침, 시래기 된장국, 육개장, 빈대떡 등등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먹고 자랐고 나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그런 음식들이 그리웠다. 그러나 미국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러니 직접 해 먹을 수밖에 없다.
부대찌개
다행히 이 동네 한국마켓과 중국마켓엔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오긴 한다. 한국과 완벽히 똑같지는 않아도 아쉬운 데로 먹을 만하다. 그래서 말린 고사리도 사고, 풋배추도 다듬어 삶고 그렇게 스스로 해 먹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혹은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의 맛을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정말 여기서 구하기 힘든 재료는 한국에서 공수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한 20여 년 지나니 정말 비슷해지는 것 같다.
가끔 교회에서 식사대접을 하거나 집으로 손님들이 오시면 나의 필살기 '시골밥상'을 차린다. 풋배추를 삶아 된장을 풀어 끓인 국에 들깨를 넣은 풋배추 된장국을 내어놓고 전날 녹두를 불려놓고 아침에 믹서기에 갈아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은 빈대떡을 굽는다. 고사리도 삶아서 불려놓은 후 마늘과 파를 참기름에 달달 볶은 후 고사리와 함께 볶아준다. 이렇게 차린 밥상은 늘 이민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다. 다들 속까지 풀어주고 마음까지 든든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가끔은 심리치료보다 푸드치료가 더 효과적인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거기다 아이들과 남편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차리면 금방 풀어진다. 아무리 삐져서 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내가 해준 요리를 먹기 위해 슬금슬금 식탁 앞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밥을 먹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렇게 밥 먹으면서 대화하며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래서 나에겐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강력한 무기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나는 맛있는 걸 해주는 엄마로 가장 먼저 기억되고 아이들이 가끔 집을 떠나면 항상 집밥을 가장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이렇게 까지 요리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집 밖에 나가기만 해도 식당이 즐비하고 스마트폰 몇 번 클릭하면 집으로 바로 배달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이민 생활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나에겐 나도 몰랐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주는 뿌듯함이 쏠쏠하다. 대부분이 내가 집에서 식사대접을 한다고 하면 무척 기대하고 좋아해 주신다. 거기가 아이들 기억에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무척 많이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나거나 혹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엄마 요리"로 나를 많이 기억해 주고 그리워할 것 같다. 그런 생각만 해도 열심히 요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사가 될 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지금 시대엔 요리를 잘한다는 건 확실히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