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럴 거면 나가서 살아!"
1970-1980년대 한국에선 자녀가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당연히 맞는 줄 알고 컸다. 어린 시절 멍이 들도록 맞기도 했고 대문밖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한 벌보다 내 마음에 대못으로 박혀서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한 것은 나를 향해 무심코 내뱉은 부모의 말이었다. 정작 그 말을 뱉은 당사자들은 이미 기억조차 하지도 못하는 말들이 내 기억창고에 화석처럼 굳어버려서 나를 괴롭혔다. 오래도록 그 말들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했다.
맞아서 생긴 멍자국은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상처된 말들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고 짙어졌다. 웬만한 상처는 시간이 약이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약이 되지 않았다. 그 언어의 힘을 너무도 잘 알기에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서 가장 조심한 것이 내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이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가정 안에서 자녀나 배우자를 향해 긍정적인 언어 격려와 위로의 언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과학적으로도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언어보다 5-6배 오래간다. 존재를 부정하는 상처되는 말은 칼날과 같아서 한 번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의 마음을 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가정 안에서 자녀와 배우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런 언어만 서로에게 하지 않아도 우린 더 믿을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꼬물꼬물 품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아기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 아기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은 채 오 년도 가지 못한다. 아이가 말을 하고 뛰어다니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취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번번이 부모를 향해 'No'라고 외치면 나를 괴롭히기 위해온 작은 악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 많은 부모들이 '너 이럴 거면 엄마 아빠 딸/아들 아니야!' 혹은 아이가 점점 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 호적에서 파버린다. 너 이럴 거면 나가서 살아! 너 이렇게 말 안 들으면 할머니집/고아원에 보내버린다'라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부모들은 진심이 아니다. 그냥 화가 나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강하게 말하면 혹시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따라줄까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모의 말에 아이들이 ' 아..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속상하시면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실까?' 혹은 '아 내가 정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해서 이렇게 심하게 말씀하시는구나. 다음부터 다시는 이런 나쁜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할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 부모님은 나를 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구나. 나는 버림받을 수도 있구나.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믿음과 생각은 부모와 자녀사이의 애착에 손상을 가져오고 개인의 자아상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 부모에게 버림받을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뭐 말 한마디가 그렇게 큰 영향을 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애착손상과 부정적인 자아상은 성인이 되면 될수록 문제를 만든다. 존재자체로 수용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거나, 완벽을 추구하거나 착하고 순응적인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타인이 원하는 조건이 갖추어야만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혹은 반대로 스스로 원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살게 될 수도 있다.
부모가 자녀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아이가 정말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교정을 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때렸을 수도 있고, 욕을 했을 수도 있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옳지 않은 행동을 단번에 교정하고픈 마음에 어떤 부모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그러면 한 번에 고쳐질까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협박은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기보다는 부모는 나를 버릴 수 있는 존재로만 각인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그런 공포와 불안은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문제행동이 증가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인 것이고 어른의 보호과 가이드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아이의 미숙함이나 충동성이 아이 존재의 거부나 부정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아이의 나쁜 행동을 수정하거나 훈육을 할 때는 아이의 나쁜 행동에만 집중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안 돼, 동생을 때리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이런 나쁜 행동을 계속한다면 000은 못하게 될 거야.'처럼 행동만 수정해야 한다. 이런 행동수정은 한 번으로 되지 않는다. 수십 번 수백 번의 훈육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동생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지만 너는 여전히 이 집에서 소중한 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부모를 향한 믿음이 있어야 애착이 견고해진다.
두 번째는 부모의 가치관이나 취향이 다를 때 부모들이 이런 협박을 할 때가 많다. 아이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가치관이나 취향에 맞지 않은 선택을 할 때 부모들이 아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음악 하기만 해 봐, 쫓아낼 줄 알아' '머리색깔이 그게뭐야?당장 바꿔. 안그럼 나가서 살아'등 같은 경우이다. 아이는 항상 부모의 기대를 채워줘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부모들의 대부분은 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자신이 누구보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하는 것이라 변명한다. 하지만 이런 부모들의 큰 실수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알아가는 경험, 실패할 경험,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 다시 일어나는 경험 등을 막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정작 아이들을 주도적인 아이, 독립적이 아이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나 욕구를 채워주지 않으면 부모로부터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존재라 믿게 된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애착에 손상을 주고 늘 부모나 타인의 기대를 채우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 확률이 높다. 이런 개인의 인생은 절대로 삶을 주체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가 없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하길 바란다. 부모의 불안한 마음을 좀 접어두고 자녀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선택이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부모의 결정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지만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그들의 인생의 주인은 스스로여야 하고 각자가 개척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비록 그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 하더라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녀에게 넘어지고 실패할 기회, 거기서 다시 일어나는 경험, 스스로 선택한 것을 책임지는 경험들을 쌓을 수 있도록 부모는 지혜롭게 다가가야한다. 따라서 협박을 해서라도 부모의 뜻을 따르게 만드는 것은 자녀의 날개를 꺾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내 입으로 나가는 말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수도 없이 나의 존재를 거부하는 협박을 들으면서 자랐다. '너는 다리밑에서 주워왔다. 너네 엄마 찾아가라, 이렇게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파버린다/쫓아낸다. 부모말 안 들어 꺼면 엄마/아빠라고 부르지도 마라'등등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던 말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주 어릴 땐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정말 부모님은 마음만 먹으면 나를 당장에라도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분들처럼 느껴졌다. 그런 부모 안에서 나는 기를 펼 수도 없었고 마음껏 성장할 수 없었다.
후에 어른이 되고 나서 그것이 부모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알았을 땐 마음으로 안도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향해 협박으로 우리를 통제한 것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은 무척 아팠다. 물론 부모도 그렇게 밖에 우리를 양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말에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고 눈물지었던 수많은 날과 그 당시의 어린 내가 너무나 안쓰럽고 불쌍했다.
부모에게 들었던 말은 그것으로 내 삶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들었던 무수한 협박과 억압의 말들은 내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아이를 키울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그렇게 듣기 싫어했고 공포스러웠던 부모의 말들이 내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내 아이의 말을 잘 듣게 하기 위해 부모와 똑같이 협박하는 내 모습과 그 말을 듣고 나를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아이의 마음 모두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달라져야 했다. 너무 힘들지만 내가 그 언어의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이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을 알았다. 그래서 멈추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쫓아낸다던가 버린다는 식의 표현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무리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화가 나게 만들어도 미성년자인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협박은 하지 않는다.
아이를 향해 과장된 칭찬이나 과도한 찬사보다 아이의 존재를 거부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혹여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 있다면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이런 말은 아이들에게 훈육이 되거나 교육이 되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을 겁주는 것이고 협박에 불과하다.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이 아이들에겐 가장 큰 공포이자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라도 아이들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고 애착에 금이 가게 만들기도 한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할 지 몰라도 부모와 친밀해 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이런 애착 손상은 아이들 마음에 큰 구멍을 만든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