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5월이 가정의 달이라 에비뉴엘이라는 잡지사에서 건강한 가족에 대한 짧은 칼럼을 부탁하셨습니다. 책 한 권으로 풀어도 모지랄 것 같은 가족이야기를 한 페이지에 담는 것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만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칼럼을 접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이자 내 인생의 가장 큰 화두였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왜 우리 엄마아빠는 자주 싸울까? 왜 할머니는 엄마와 나를 미워할까? 왜 아빠는 엄마를 지켜주지 않는 걸까?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런 질문과 고민들로 나의 유년시절이 채워졌다. 배고프지도 않고 가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족 안에서 유대감이나 친밀감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심리적 결핍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의 자아상과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런 경험을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가족에 대해 공부하고 노력했다. 그 덕분에 심리치료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심리치료사가 되고 나서는 더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만났다. 가족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만나고 가족 때문에 희망을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본다.
이처럼 가족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특별히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가족이란 세상의 전부이자 우주이다. 그랬기에 내가 가져보지 못한 이상적인 가정을 아이에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나의 이삼십 대를 바쳤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꿈꿔온 가족의 모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은 저절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가족이기에 우린 더 오해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피를 나눈 천륜이고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묶인 관계이지만, 각 구성원은 전혀 다른 기질과 생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각각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 시간과 물질을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갈등이나 오해는 너무나 당연하다.
건강한 가족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갈등과 오해를 잘 조율하고 협력해서 공생하는 법을 알고 있다. 바로 가족 간 소통의 수준이다. 나는 소통의 수준차이가 얼마나 다른 가정의 모습을 만드는지 알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몰랐다. 경청하고 대화하고 조율하고 화해하는데 미숙했다. 당연히 가정 안에서 서로를 향해 비교, 협박, 억압의 언어가 난무했고 가족 구성원들은 상처받고 병들 수밖에 없었다. 다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교육 수준이 높고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소통의 부재는 가족관계를 불화하게 하고 병들게 만든다.
때문에 가족을 꾸리고 나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소통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알아가기 위해 시간을 만들었다. 배우자와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정한 말그릇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어린 시절에 들어보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 말들이 가정 안에서 자연스러워지도록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큰 소리가 나고 토라지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 다시 다가가려고 했고 결국은 서로를 더 이해하거나 인정함으로 화해했다. 가족이 있어도 늘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던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큰 힘이고 의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소통을 익히는 데 지름길은 없다. 내가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태도, 그리고 말 한마디에 신중함, 다정함과 배려를 담아야 한다. 관심을 쏟아야 하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 과정은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다. 하지만 일단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좋은 언어의 습관이 만들어지면 더 이상 소통이 어렵지 않다. 가정 안에서 소통이 어렵지 않다고 느껴질 때까지 연습하고 훈련할 수만 있다면 가족관계는 분명히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