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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쁜 것은 절대로 선이 아니다

by 원정미

미주 RV 여행을 결정하고 가장 큰 프로젝트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살던 곳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였다. 22년 전 우리는 영끌을 해서 미국 산호제에 단독주택을 샀다. 그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나와 남편은 무리해서 방 4개 화장실 3개가 딸린 실평수만 50평이 넘는 집을 샀다. 나아가 앞마당 뒷마당옆마당까지 딸린 이 집은 나에게 저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서 아이 셋을 낳고 22년을 눌러살았다. 맥시멀리스트인 남편과 아티스트였던 나 그리고 아이들 키우면서 얻어오고 사모은 물건들은 집안 구석구석 차고도 넘쳤다. 그것을 알기에 떠나는 것보다 이 집을 정리하는 것이 늘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늘 행동보다 감정이 앞서는 남편은 여행을 간다는 마음에'당신은 손하나 까딱하지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고 진짜로 집을 정리해야 하는 날은 하루하루 성큼성큼 다가왔다. 시간이 다가왔지만 남편은 자신의 일이 바빠 집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사람을 고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린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물건을 RV로 가져갈 것, 버릴 것, 창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분류먼저 해야 했기에 사람을 부르기 너무 애매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남편의 말을 예전 같으면 철떡 같이 믿고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겠지만 20년 넘는 결혼생활을 통해 그건 그때 그 남자의 감정일 뿐이지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조금씩 내가 해야 할 정리와 처분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 50평에 빼곡히 쌓여있던 물건들은 나를 질리고 지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에 집을 내놓기 위해 페인트 칠할 날짜가 정해지고 인터넷에 올릴 내부사진 찍는 날짜가 정해지자 우리는 더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들 아침에 학교를 보내고 하루 종일 정리하고 버리고 청소하기를 반복했다. 거기다 복층인 집을 하루 종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는 듯했다. 남편도 퇴근하자마자 밤 11시- 12시까지 짐 싸고 청소하기를 반복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도 높은 육체적 노동의 연속이었다.


날짜는 다가오고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아있으니 덜자고 더 일찍 일어나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당연히 마음에 여유는 없어지고 짜증은 늘어만 갔다. 남편과 나는 생전에 하지 않던 말도 안 되는 실수도 연발했다. 아이들의 뻔한 실수에도, 늘 하던 일에도 괜스레 목소리는 높아지고 신경질이 났다. 너무 바쁘고 지쳤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게으르고 할 일없는 것보다 바쁜 것이 미덕인 것처럼 흔히 말한다. ' 바쁘면 좋지머~'라고. 바쁘다는 말엔 뭔가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극도의 바쁨은 사실 위험신호이다.


바쁘다는 것은 육체적을 심리적으로 과도한 에너지를 쓰고 있는 말이며 그 말은 일상의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절대로 무한정 에너지가 솟아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 하던 실수가 잦아지고 신체적 심리적 여유가 없기에 짜증과 화가 많아진다. 즉 감정조절이 어려워지고 그러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말실수를 하게 된다. 당연히 싸움이 늘어나고 갈등은 깊어진다.


이런 시간이 오래되면 가까운 사람들과 당연히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에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생활로 지나치게 바쁘게 지낸다면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은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의미도 모른 채 세월은 흘러버리고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방전된 배터리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충전되지 않는다. 배터리에 연결된 모든 코드를 뽑고 원래 전압보다 높은 전기충격을 가해야 다시 충전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이미 번아웃이 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 회복이 어렵다. 그래서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1-2주 사이에 에너지 고갈과 심리적 방전을 느낀 나는 '가지치기'를 단행했다. 집정리와 이사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빨리빨리 포기했다. 아이들 점심도시락이나 저녁 집밥도 포기했다. 외식을 하거나 패스트푸드로 때웠다. 외부약속이나 활동도 더더욱 만들지 않고 모임도 다 거절했다. 아이들에게도 엄마 아빠가 당분간 예전만큼 시간을 보내주지 못하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되도록 일찍 자려고 했다. 그렇게 외줄 타기를 하듯이 겨우 버티고 큰 불화(?) 없이 집정리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이런 단기간의 바쁜 생활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늘 발생하기에 그 시간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전력질주하듯이 바쁘게 사는 삶은 위험하다. 어디로 향해 달리는 지도 잊은 채 바쁜 생활에만 몰입한다면 결국은 자신의 에너지가 방전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던지 주변을 잃게 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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