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은 너무나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처럼 보였다. 가정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삼시세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 모두 술, 외도, 도박, 사치 등과는 거리가 먼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분들이셨다. 1980년대 초반 그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듯 다른 아이들 만큼 맞았고 혼난다고 생각했다. 좀 더 크고 나선 다른 가정들과 달리 고부갈등이 심하고 부모님의 싸움이 잦다는 것만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많이 아팠다. 그 당시는 내가 아프다는 것도 몰랐지만 나는 늘 죽고 싶었고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소아 우울증에 걸린 아이였다는 것은 30년이 흐른 후 미국에서 상담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소아 우울증이 걸린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어딜가나 나는 먼지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은 존재. 함께 사는 가족들 중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어린시절 소공녀를 읽으며 책 속의 주인공처럼 언젠가 진짜 부모님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상상했다. 그렇게 나는 사랑에 목말랐고 그래서 아팠다.
그러나 부모가 되고 나서 보니 부모님은 나와 오빠를 나름 사랑하셨다. 다만 그 사랑이 나에게 닿기엔 너무 짧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렇게 와닿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음으로.. 상담가의 관점에선 부모님은 심한 아동학대의 피해자였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나의 부모님 세대에선 학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들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전쟁과 가난의 트라우마는 그 당시 어른들에게 생존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생존과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은 무시되었다.
노래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시던 감수성 풍부하셨던 나의 외할아버지는 6.25 전쟁으로 고등학생 나이에 군인이 되셨다. 그 당시 돈이 없어 형이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후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심하게 앓으시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셨다. 가수가 꿈이 셨던 전형적인 예술가 기질이 풍부하셨던 외할아버지에겐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총에 맞는 경험들은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돈이 없어 못 간 외할머니는 아이 셋과 병든 남편을 데리고 사시느라, 참 독하게 치열하게 사셨다. 생계가 우선이라 딸들은 모두 방치하시고 또 자신의 삶의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배운 게 없어서, 아이들에게 분풀이도 많이 하셨다. 돈버시느라 세 살도 안된 엄마를 방에 가둬놓고 일을 가셨다는 이야기며, 또 엄마가 말이 느리다며 꼬챙이로 엄마의 입을 때려 이가 부러졌던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그런 가정에서 첫째 딸로 크신 어머니는 도망치듯 21살에 결혼하셨다. 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3개월 만에.. 결혼만 하면 그 지긋지긋했던 불행과 아픔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을 줄 아셨다고 한다. 그러나 친정부모님보다 훨씬 매섭고 무서운 시어머니를 만날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 가랑촌에서 부산으로 나름 성공적인 취업을 하신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를 끔찍하게 병적으로 사랑하는 할머니까지 부산에 정착하셨다. 까막눈에, 7자녀 중에 4자녀는 병으로 잃으시고 큰아버지는 아들 없는 큰집에 입양 보내신 할머니는 말 잘 듣는 둘째 아들인 아버지에게 병적으로 집착하셨다. 아들이 말을 안 들어도, 며느리가 말을 안 들어도 목 메달아 죽는시늉을 하는 할머니 밑에서 아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육체는 어른으로 성장하셨으나 아버지의 정서는 할머니의 착한 아들, 딱 그 수준에서 멈추셨다. 그리고 그냥 사회적 기능 즉 돈 버는 일, 그래서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을 굶기지 않고 살게 하는 일에서 삶의 목적이 되셨다. 가난만 면하면 당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알고.
그런 두 분이서 만나서 가정이 이루었으니 그 가정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내면이 어른이 되지 못한 부부의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았다.부모님도 당신들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고통을 자식들에게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자신들은 방법을 몰랐다고 했다. 그냥 배고프게만 하지 않고 학교만 보내주면 되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런 부모님의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당신들도 제대로 된 건강한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없으니 나와 오빠를 건강하게 사랑했을 리는 없었다. 부모님의 육체는 성인이 되어 부모가 되었으나 내면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던 부모님은 우리를 인내하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키울 수 없었다.
사랑과 인내 그리고 용납으로 양육하기보다는 체벌, 엄포, 그리고 협박들로 우리를 굴복시키셨다. 어린 시절에 너무나 무섭고 매서웠던 부모님들의 엄포, 협박들은 나중에 상담을 공부하고 보니, 심리적으로 겁 많고 소심한 개들이 더 많이 짖고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방어기제인 것을 알고 나서 기가 찼다. 부모님의 감추인 불안과 걱정을 푸는 방법이 고작 그렇게 우리에게 겁주고 협박하는 거였다는 것을 알고 너무 억울했다.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데...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데
상담에선 그 내담자의 마음 상태와 정신질환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으면 3대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유전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엄마의 탯줄을 끊고 나온 아이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존재일 뿐이다. 갖 태어난 생명은 엄마 젓을 입에다 갖다 주지 않으면 그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생명이다. 그래서 그런 그 아이를 늑대로도 키울 수 있고 훌륭한 인격체로도 바꿀 수 있는 것이 환경의 힘이고 사실 양육자의 힘이다. 그렇기 때문인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시대의 환경, 부모의 양육태도를 알아야 하고 또 그 부모를 알기 위해 조부모의 시대적 배경과 양육태도를 알아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전쟁의 트라우마는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듯하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남들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우리 윗세대의 불안과 경쟁심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다.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감정표현이 서툰 우리나라 어른 세대의 모습은 어쩌면 전쟁과 가난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 부모세대들이 받았던 신체적, 정서적 학대들은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다.
한마디로 나 또한 학대를 받았다. 부모님의 학대 경험이 다음 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당시 부모님이나 할머니는 내게 정서적으로 안전한 분들이 못되셨다. 나는 부모님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끼지도 못했고, 부모가 나를 배려하거나 아낀다고 느끼지 못했으며 가정이 나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자주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팠으나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마 억누른 나의 감정들이 그렇게 표출되었으리라.
힘들 날도 많았지만 가끔은 웃는 날도 있었고 외식도 하고 아주 가끔은 여행도 다녔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집도 있었고.. 내방도 있었고.. 배도 고프지도 않았고.. 학교도 다녔다.
그러나 나는 늘 불안했다.
엄마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기어이 끝내고 언제 떠날까 불안했고
엄마 없는 집에 할머니랑 둘이 남을게 너무 끔찍했고..
내 존재가 엄마 아빠 기준에 한참 미달인 것이 너무 한심했고
혹여 내가 뭔가 잘못해서 쫓겨날까 봐.. 늘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순해지고 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30-40대 어머니는 늘 신경이 예민했고 아버지는 늘 무심하고 바쁘셨다. 어머니는 자주 우울했고 자주 아프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너무 억울한 일이 많았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를 돕느라 밤이며 낮이며 힘든 비닐을 때우고 포장하는 일을 하셨고, 그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느라 어머니의 어깨는 기어이 망가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장사 때문에 집에 데리고 있던 시댁 쪽 먼 조카들이 항상 우리 집에 2-3명씩 거주했다. 그 식구들 빨래며 밥까지 다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일 년에 치르는 제사만 12-13번. 주말엔 아버지 쪽 친척들이 오면 집에 항상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여기다가 가끔은 말도 안되는 핢머니 생떼와 어깃장을 다 온몸으로 받으셔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있었다.
나라도 이 집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 어머니를 더 힘들게 했다간 정말 그녀가 집을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본능적으로 순하고 착하게 컸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이라도 나는 정서적으로 기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모님과 불안정한 애착이 형성되었다. 정서적으로 나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것이다. 아동학대의 종류는 네가지가 있다. 신체적, 성적, 정서적 학대와 유기. 신체적 학대나, 성적, 유기 방관으로 인한 학대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그래서 타인에 의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서적 학대는 오직 마음에만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다른이에게 발견되기도 쉽지 않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보통 심한 언어폭력이나 감정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가지 학대만큼이나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왜냐하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학대의 결과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잘 보여야 했다. 어떤 이유로든 집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거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날마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부모님의 부부관계와 고부 갈등에 나로 인한 어떠한 문제나 긴장을 유발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무슨 문제든 혼자 해결하려고 하고 혼자 끙끙 싸매다가 마음으로 삼켜버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말 잘 듣고 혼자서 알아서 잘하는 착한 딸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허구의 독립심을 쌓으며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 나만의 성을 만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너무 빨리 어른인 척을 했고 그래서 오히려 내면의 아이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스스로 너무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처럼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미성숙하고 책임감 없다며 비난했다. 나도 그렇게 부모님처럼 몸만 성장한 성인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