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감았다. 무사히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더 미룰 수 없을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도 망설여진다. 일기 쓰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때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흔적은 고스란히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한 번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영원히 잊고 싶은 '그 사람'에 대한 길고도 짧은 이야기.
당시 나는 출근과 동시에 매일 매일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그 사람은 지옥 그 자체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내가 뭘 하는지, 누구랑 얘기하는지, 어딜 가는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날은 내가 움직이기만 해도 발작하듯 화를 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문서를 건네며 확인을 부탁했는데 그걸 낚아채고 소리를 지르던 모습.
"네가 뭔데 이걸 봐? 뭘 안다고? 아, 진짜 짜증 나게!"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화를 내고, 내고, 또 내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리를 피하면 따라와서 악을 썼다. 그 순간 내가 죽어야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똘이는 어떡하나. 우리 엄마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외면하고 싶었겠지. 나는 묵묵히 당해내야만 했다. 그런 생활이 3개월을 넘어가고 있었다. 회사 밖에 나오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혼자 있으면 자꾸 울었다.
더는 안 된다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만두는 것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돈은 벌어야 하는데 여기서 멈추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밤마다 제발 내일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날은 똘이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길에 한바탕 울었다. 먼저 도착해 대합실에서 기다리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내리는 곳으로 나갔다. 멀리서 걸어오는 똘이가 보였다. 나는 주저앉았다.
회사를 그만두면 결혼도 못 하겠지.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울고 또 울었다. 빵집 구석에 앉아 휴지를 산처럼 쌓았다. 1시간 가까이 말없이 듣고 있던 똘이가 입을 열었다.
"그만둬."
그 말에 내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사실 나는 무서웠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일단 결혼을 해야 하니까 좀 더 참아보라고 하면 어떡하나 겁이 났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판단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네가 대단히 큰 실수를 했어도 사람들 앞에서 너를 그렇게 대하는 건 잘못된 거야. 이건 울 일이 아니라 화낼 일이잖아. 목소리도 큰데 소리도 지르고 뭐라도 집어던지든가 다 엎어버렸어야지. 참길 왜 참고 울긴 왜 울어, 바보야."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이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당장 월요일부터 나가지 말라는 말에 울면서 웃었다. 말만 들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우는 동안 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일어섰다.
실컷 울고 나니 몸에서 나쁜 기운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굉장히 사연 있는 얼굴을 하고 예식장에 들어갔다. 행복해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 자리에 서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 보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이제 와서 후회되는 것은 딱 하나,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끝도, 이유도 없는 적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어리숙한 내 모습은 오랫동안 상처가 됐다. 그래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그 사람이 내게 퍼부은 악담과 달리 나는 무사히 결혼했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남편을 얻었다. 같이 펭수를 보고 주말 아침에는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다. 이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이 꼭, 뿌린 대로 거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