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이세요?
이번 겨우내 검은 패딩만 입고 다녔다. 무릎까지 오는 패딩과 종아리까지 오는 패딩을 번갈아 가면서 입었다. 그러다 문득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회사 로비에 들어설 때마다 나만 너무 김밥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이라도 좀 제대로 입고 다니려고 엄마 집에 가서 코트 몇 벌을 가져왔다.
나는 뭐가 많다. 가전, 가구를 제외하면 우리 집 물건은 8할이 내 지분이다. 가장 극단적인 건 옷인데 내 옷은 드레스룸 하나를 꽉 채운 반면 남편은 자기 방에 딸린 옷장에 가진 옷이 다 들어간다. (심지어 본가에 아직도 내 옷이 남아 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또 들었다.
옷이 많아도 입을 수 있는 몸뚱이는 하나다. 게다가 거의 입는 옷만 입는다. 안 입는 옷을 좀 버리면 좋을 텐데 나는 맥시멀리스트이면서 못버려리스트를 겸하고 있다. 본가에서 가져온 코트를 걸려고 보니 정말 죽어도 걸 곳이 없었다. 이제는 비워야 할 때였다.
팔이 자라는 건지 소매가 짧아져서 못 입는 패딩을 버리기로 했다. 버리려고 보니 그렇게 깨끗하고 아까울 수가 없었다. 밖에 내놓지도 못하고 옷을 접었다 폈다 법석을 떨다가 당근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바로 앱을 깔았다.
조명까지 신경 써 가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누가 사겠냐는 남편 반응과 달리 1시간도 안 돼서 연락이 왔다.
"대박! 당근!!!"
당근 님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남편에게 자랑했다.
"이게 팔렸다고? 왜?"
"아직 멀쩡하다고!"
기세등등해진 나는 패딩에 혹시 지저분한 곳은 없는지 잘 살펴보고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종이 가방에 정성스럽게 접어서 담았다. 이게 당근이구나!
다음 날 아침 당근 님을 만나러 가면서 남편과 연습을 했다.
"당근이세요오? 이렇게 하는 거래."
"그게 뭐야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진짜였다. 집 앞 주차장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으니 여자분이 차에서 내려서 걸어오셨다.
"당근이세요?"
"오? 네네!"
나의 첫 당근 님은 빠르게 만 원을 주시고 가방을 받아 떠나셨다. 옷이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좋은 거래였다는 후기가 와서 정말 뿌듯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수건 세트 팔아도 돼? 서랍에 뭐 들었어? 저 시계 안 쓰지 않아?"
"... 내 거는 건드리지 마."
"왜~ 나 당근해야 해~"
"당근 시작하면 막 팔려고 한다더니 진짜잖아?"
오늘은 수건 세트로 (남편이) 두 번째 당근을 하고 왔다. 뒤늦게 시작한 당근으로 티끌을 모아 태산 같은 대출을 갚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다음엔 또 뭘 팔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