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May 01. 2023

서울대와 토마토수프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땐

 

 쉬는 동안 이곳저곳 부지런히도 면접을 보러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서울대다. 결혼 전 고려대 근처에서 1년, 연세대 근처에서 9년을 살았는데 이상하게 서울대는 한 번 지나갈 일도 없었다. 서울대 안에는 막 시내버스도 다닌다던데, 에버랜드보다 훨씬 크다던데, 그런데 서울대가 진짜 서울에 있기는 한 건가? 저한테 서울대는 약간 호그와트(?) 같달까요.


 서울대 서류 합격 소식을 듣고 딱 30분 즐거웠다. 2차 걱정을 하는 나를 보며 가족들 반응은 탐탁지 않았는데 혹시나 합격해도 그 먼 데를 어떻게 출퇴근할 거냐고 타박을 들었다. 아, 안다고, 돼도 안 갈 거라고, 그냥 서울대 구경만 할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가고 싶었다.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 계약직이라서 더 그랬다. 이 지긋지긋한 구직 활동을, 주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이직을 끝내고 싶어서.


 여기저기 뿌려놓은 게 많아서 3일 연달아 면접을 봤다. 그중 서울대가 마지막이었다. 서울대 안 보이는 서울대입구역에 내리자마자 전날 면접 본 곳에서 불합격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속이 안 좋았다. 오후에 시험과 면접을 보려면 뭐라도 먹고 들어가야 했는데 입맛이 없었다. 밥도 싫고 빵도 싫어서 역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다 뜨듯한 수프 정도면 소화가 잘될 것 같아서 서브웨이에 갔더니 브로콜리 뭐시기밖에 없다고 했다. (브로콜리 시렁) 나와서 또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알고 간 건 아닌데 스타벅스에도 수프가 있었다. 메뉴 중 단호박수프가 먹고 싶었는데 토마토수프랑 버섯수프밖에 없다고 해서 토마토를 골랐다.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수프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자니 면접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었다. '서울대여, 인재를 알아보라'며 자신감 넘치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반소매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보이는 날씨에 춥고 어깨가 처지고 맥이 빠졌다. 


 "주문하신 토마토수프 나왔습니다~"

 넋 나간 얼굴로 다가가니 직원분이 나를 잠시 쳐다보고 물었다.

 "따뜻한 물 한 잔 드릴까요?"

 "아... 네, 고맙습니다."

 자리에 돌아와 물을 한 모금 나시고 나서야 입이 바짝 말라 있었다는 걸 알았다. 주문한 음료 대신 물을 한 잔 다 마시고 수프를 떠먹었다. 

 '오, 세상에...'

 입맛 없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곁들여 나온 통밀 토스트 칩까지 다 먹어 치웠다. 몸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면접은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토마토수프를 먹고 힘내서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눈물)


 서울대 면접은 나에게 물 한 잔을 챙겨주신 직원분의 다정한 마음과 토마토수프를 남겼다. 힘들 때 따뜻한 걸 먹으면 좀 나아지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돌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는 남겨두자고 다짐했다. 오늘은 딱히 힘들지도, 춥지도 않지만 일부러 나와서 토마토수프를 먹어봤다. 음, 역시 맛있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30대의 그림 교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