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재작년과 작년을 자격증 취득에 탕진한 나는 올해가 시작될 때 굳게 다짐했다. 올해는 기필코 재미있는 걸 하면서 살겠다, 쓸모를 따지지 않고 재미만 있는 걸 하고 말겠다고. 그래서 두 가지를 시작했는데 하나는 요가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 동네 평생 학습관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5살 무렵 다녔던 미술 학원이다. 당시 원장님은 몇 달 다녔으면 학원비에 대한 보답으로 상장 하나는 쥐어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는지 무슨 대회에 내야 한다며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또래보다 유독 형편없는 그림 실력을 갖췄던 5세 초롱은 빈 종이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고 결국 원장님은 누군가 그린 그림을 주며 따라 그리라고 하셨다. 바다 아래에 집이 있고 파마머리를 한 (남의) 엄마가 활짝 웃고 있는 걸 꾸역꾸역 따라 그렸다. 원장님의 바람대로 상을 받긴 받았는데 얼마 못 다니고 학원을 그만뒀다.
그림 때문에 난처했던 적도 있다. 아빠는 똥손 딸을 두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려서 내가 초등학생 때 교내 통일 그림 그리기 대회 숙제를 대신해 준 적이 있다. 초록색 한반도 위에 남한에서 북한을 향해 가는 기차를 그렸는데 무려 금상을 받았다. 이후 선생님이 도 대회에 나가라고 하셨고 무슨 핑계를 대고 안 나갔는지는 까먹었다. 이후 절대 아빠한테 미술 숙제를 부탁하지 않았다.
똥손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사들인 '누구나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책이 집에 7권이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은 모르겠지. 그림을 눈앞에 두고도 따라 그리지 못하는 나 같은 똥손도 있다는걸.
실력에 비해 과한 아이패드, 펜슬, 그림 그리기 앱까지 사놓고 묵혀 두고 있다가 디지털 드로잉 수업에 나가기 시작한 게 지난 2월이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하면서 첫 수업에 갔던 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하얀 백발의 어르신부터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으실 것은 같은 여성분도 계셨다. 15명 중에 젊다고 할 만한 사람은 나 포함 세 명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그분들의 그림 실력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림 그리기 앱 쓰는 걸 어려워했지만 친절한 선생님의 지도 아래 따라 하다 보니 금세 익숙해지면서 엄청난 작품들을 그려냈다. 수업은 선생님이 보여주는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거나 색·구도 등을 자유롭게 바꾸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그림과 손절했다가 부활한 똥손은 매시간 쩔쩔맸다.
"아유~ 그림이 너무 귀엽네요~ 잠시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친절함에 끈기까지 갖춘 선생님은 활개 치는 똥손을 때려잡기 위해(?) 자주 펜슬을 가져가셨다. 선생님이 지나가신 자리에는 카톡 프사로 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그림들이 남았다.
매주 토요일 아침, 두 달 동안 열심히 나갔던 그림 교실은 자격증 시험과 맞물리고 이런저런 일에 밀리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선생님이 목표하셨던 성당 그리기에 다들 성공하셨는지 궁금하다. 곧 다음 학기 수강 신청이 돌아오는데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 아무 생각 없이 사각사각 그림 그리던 그 시간이 참 좋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