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게으루미!
우리 집에는 개미와 베짱이가 산다. 베짱이를 맡고 있는 남편은 주말을 거의 누워서 보낸다. 월화수목금 성실하게 살았으니 토일은 누워있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논리다. 머리맡에는 아이패드로 좋아하는 예능을 틀어놓고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뒹굴뒹굴거린다. 내둥 누워 있는 걸 보고 왜 자기 방에 침대를 놓았는지 이해하게 됐다. 누워 있는 게 지겨워지면 앉아서 컴퓨터 게임을 한다. 최근에 거금을 들여 컴퓨터를 바꿨는데 아주 게임하는 맛이 난단다. 어제는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고백을 했다.
"이거 사실 게이밍 컴퓨터다?"
그렇구나. 그냥 베짱이인 줄 알았더니 게이머 베짱이었구나. 페이커 님 이번에 금메달 따셨던데 베(짱)이커로 키워볼까.
베짱이가 누워 있는 동안 개미는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바쁘다. 일단 개미는 토요일에도 7시면 눈이 떠진다. 평일에 어질러놓았던 방을 치우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좀 읽어야 한다. 용돈 기록장도 써야 하고 요즘 거의 손을 놓은 자격증 공부도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이불도 빨아야 하고 새로 시작한 일본어 교재도 들춰봐야지. 주말에 할 일을 쭉 리스트로 적고 하나씩 지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숨이 막히네요.
최근에 허리디스크로 고생을 했는데 누워서 끙끙대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안타까워했다.
"나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으면 허리 안 아플 텐데..."
"...저리 가, 베짱이."
2월 말에 회사를 그만둘 때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장거리 출퇴근을 3년째 꾸역꾸역하면서 자격증 공부를 2년 넘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나를 볶아쳐 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후회한다.
올해의 1/4 정도를 방황으로 보내고 깨달은 건 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남이 괴롭히든 내가 괴롭히든 나를 괴롭혀서 고장 나면 그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나는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울리히 슈나벨이 쓴 <휴식 (행복의 중심)>이라는 책에 이런 파트가 있습니다. 휴식에는 용기와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본인이 도움을 얻었던 쉼의 방법, 휴식의 기술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어요. 휴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 믿지 말자. 가속화가 체계화된 사회에서는 휴식을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한 번쯤 불편한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뭐야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이런 상황이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동호회를 만들자. 능숙한 게으름뱅이와 접촉하는 것처럼 긴장을 잘 풀 수 있는 것도 없다.
팟캐스트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Ep.57 휴식의 기술
극내향인인 내가 휴식을 위해 동호회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능숙한 게으름뱅이라면 우리 집에도 한 명 있었다. 이 얘기를 남편에게 하면서 귀여운 별명도 하나 붙여주었다.
"나도 이제 여보처럼 좀 게으르게 살아보려고. 포켓몬에 내루미 있잖아. 여보는 게으루미야. 나도 이제 게으루미가 돼야지."
귀여운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편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꾸는 게 쉽진 않지만 그래도 요즘은 주말에 할 일 리스트를 악착같이 적지 않는다. 문득문득 조급해질 때면 게으루미 옆에 가서 같이 누워 있는다. 게으루미의 따끈한 배에 손을 얹고만 있어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오늘도 잘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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