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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Apr 07. 2024

오늘의 개 당번

우리 순이 버진로드 데뷔기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반려동물을 양육(?)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한 강아지를 키우려면 온 가족이 필요하다' 정도가 되겠다. 우리 집은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한 강아지, 순이를 위해 1조 아빠와 엄마, 2조 동생, 3조 나와 남편 이렇게 3개 조가 운영 중이다. 순이는 동생이 데려왔지만 독립을 하면서 본가에 남았고 주말에 하루 정도 동생 집에 가서 자고 온다. 이렇게 3개 조가 돌아가도 순이 혼자 남게 되는 일이 아주 가끔 생겨서 1조와 2조는 보통 집을 비우는 일정이 생길 때 상의를 한다. 그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3조인 나에게 차례가 돌아오는데 어제가 그날이었다.


 동생이 오랜 연애를 마치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 무념무상이었던 나와는 달리 동생은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순이에게 화동, 아니 화견을 시키는 것이었다.

 "아니, 순이 성격을 알면서 그런 게 하고 싶다고? 말이 돼?"

 동생의 로망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던 건 우리 순이가 정말... 지랄맞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쳐다보기만 해도 목이 터져라 짖어대는 개를 데리고 어떻게 결혼식장에 간단 말인가.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개판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화견' 순이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나갔고 결혼식 며칠 전 드레스 입은 순이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뚫고 나오는 귀여움


 "하..."

 귀여워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사진을 받고 며칠 후에는 동영상이 왔다. 부모님과 결혼식장에 순이를 데리고 가서 리허설을 해봤다고 했다. 엄마가 버진로드에 내려놓자 순이는 동생을 향해 한 마리의 야생마처럼 달렸다.

 "하..."

 또 귀여워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쉬를 할까 봐 기저귀까지 야무지게 찬 모습을 보고 동생 결혼식 개 당번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일 순이 잘 부탁함

 -내일 같은 날 개 당번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망의 결혼식 날, 부모님과 순이를 모시고 동생이 예약해 둔 샵에 가서 머리와 화장을 했다. 혹시라도 짖어서 다른 손님들한테 폐를 끼칠까 봐 수시로 순이 입에 간식을 넣어주었다. 샵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예식장으로 가는 길에 하루가 참 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에 개털이 묻으면 세탁비를 물어줘야 한다고 해서 개모차에 순이를 태웠다. 한복을 입고 유아차와 크기도 비슷한 그것을 밀고 돌아다니니 몇 년 만에 만난 친척들이 아니 너는 언제 말도 없이 애를 낳았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애 아니고 개예요, 개. 짖는 거 들리시죠?"

 사람 많고 시끄러운 예식장에서 순이는 모두의 예상대로 목이 터져라 짖어댔다.

 

 드디어 식이 시작됐다. (박수칠 때마다 짖을 테니) 당연히 결혼식은 볼 수 없었고 문밖에서 순이를 안고 직원분이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날은 더웠고 순이는 뜨거웠다. (사람보다 체온이 높다고 해요) 순이도 나도 이미 쩔대로 쩔어버렸다. 이걸 정말 꼭 해야 했던 걸까. 솔직히 동생이 원망스러웠다. 끝나면 욕을 한 바가지 해주겠다고 벼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들어가실게요. 애기가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혀를 한껏 내밀고 헉헉거리는 순이를 보며 직원분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사교성 없는 우리 개는 코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왈오ㅘ왈왈왈 짖어댔다.


 "저희 사이에 보물 1호가 있는데요. 제가 꼭 결혼식에 데려오고 싶었던 소중한 손님입니다. 지금 입장하겠습니다."

 마이크를 든 동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여운 음악이 식장을 가득 채웠다. 

 "순이야, 오빠야 저기 있네, 저기."

 내가 앞을 가리키고 바닥에 내려놓자 순이가 동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중간에 멈칫했지만 동생이 부르자 끝까지 가서 안겼다. 순이는 신랑 신부와 기념사진까지 찍고 무사히 내려왔다.


 남편은 처음에 화견 소식을 듣고 뜻밖의 걱정을 했다.

 "나중에 순이가 무지개다리 건너고 나면 애들 결혼식 사진이나 영상 볼 때 슬프지 않을까?"

 "...뭐야... 그런 얘기 왜 해, 벌써 슬프게..."

 다시 뜯어말려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순이가 없는 가족사진이 없었다. 순이가 아프기만 해도 울어대던, 순이가 떠나면 다시는 털 친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지만 그런 이유로 벌써 12살이 된 순이와 추억을 만드는 일에 인색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던 개 당번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양팔에 알이 배서 욱신거렸다. 우리 개 살 좀 빼야겠다. 누나가 큰 희생 했으니 행복하게 잘 살아라, 브라더.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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