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갛고 달콤한
'올해 첫'에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그 대상은 주로 먹을 것인데 '올해 첫' 팥빙수, '올해 첫' 붕어빵 이런 거 있잖아요. '올해 첫'을 하고 나면 정말 여름이 온 것 같고 또 겨울이 온 것 같고 그렇다.
지난달엔가 '올해 첫' 수박을 사다 먹었다. 1인 가구에서 2인 가구가 되고 달라진 것 중 하나는 과일을 자주 사다 먹게 됐다는 것. 10년 자취할 때는 몰랐는데 남편과 살아 보니 나는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신혼 때 수박을 사다 먹은 것은 정말 기념비적인 일이었는데 내가 내 돈 주고 이렇게 크고 비싸고 맛있는 걸 사 먹게 되다니, 대략 이런 감상에 젖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여름에 두어 번은 수박을 사다 먹는다. 그런데 '올해 첫' 수박이... 대단히 맛이가 없었다.
"와... 이게 뭐냐..."
우리 집 수박 손질 담당 남편이 열심히 썰어서 한 입 먹어보더니 탄식했다.
"왜, 왜? (한 입 먹고) 와... 뭐냐, 이게..."
웬만해서는 맛없다 소리를 잘 안 하는 나도 참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박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마는데...
"수박 한 통 살까?"
"어? 아니?"
지난 주말 마트에서 수박을 유심히 보는 남편을 급하게 말렸다.
"노맛 수박 먹느라 얼마나 고생했냐고. 안 돼, 안 돼. 사지 마."
"이번에는 맛있을 수 있잖아."
"없어, 없어."
나의 만류에도 남편은 수박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통통 손가락으로 두들겨도 보더니 결국 카트에 실었다. 그래, 이번 노맛은 네가 책임지라는 마음으로 수박을 들고 집에 와서 하루를 거실에 방치했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이 칼을 대기가 무섭게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수박이 갈라졌다.
"물러서 이렇게 깨지는 건가."
역시 이번에도 노맛일 거라는 확신의 눈빛으로 수박 해체 쇼를 지켜보았다. 정리가 끝나고 이번엔 또 얼마나 맛이 없으려나 궁금해서 한 입 먹어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수박은... 처음이야..."
"왜? 왜? (한 입 먹고) 우와... 성공!"
그 자리에 서서 우걱우걱 수박을 먹었다. 냉장고에 안 넣어놔서 미지근했는데도 살살 녹는 맛이었다. 그날부터 냉장고를 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박이 정말 빨갛고 보석 같아."
어느 날은 그저 감탄하고,
"우리 순이 수박 참 좋아하는데, 들고 가서 먹여주고 싶다. 그럼 샥샥 소리 내면서 먹거든."
또 어느 날은 강아지 동생을 떠올리고,
"정말 행복한 맛이다."
"사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안 샀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정말 최고의 수박이야. 고마워."
이렇게 훌륭한 수박을 골라주신 남편께 경의를 표하고...
벌써 한 통 해치우고 한 통이 남았다.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다음 수박을 기대하며 맛있게 먹어야지. 이상 냉장고에 꿀수박 있는 자의 수박 자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