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타기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러 갔다.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가 주력 메뉴일 것 같은 전통 찻집이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뜨거운 레몬차를 시켜놓고 후후 불었다. 곧 일어서야 할 것 같은데 누구 하나 결혼의 ㄱ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가야 하나.' 속으로 고민하다가 대체 이다음은 언제일지 모르니 나라도 먼저 입을 열어야겠다 싶었다.
"똘이한테 결혼 말씀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괜찮으시면 오늘 상의를 좀 드려도 될까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똘이와 동생까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잘못 꺼낸 건가 순간 멈칫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명백히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은 두 가지, 생일 축하와 결혼 아니었나. 다만 어려운 이야기라 모두 피하고 싶었을 뿐.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올해는 똘이 일이 바쁘니까 어려울 것 같고요. 내년 여름 즈음이 어떨까 싶은데 어떠세요?"
두 분 모두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셨던 아버님이 입을 여셨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도 두 분 나름대로 그리신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말씀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님 말씀에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았다.
"장소는 저희가 멀리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까 중간 즈음으로 해서 A시가 어떨까 싶은데요."
여기서 급격히 아버님과 어머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마 내가 내민 카드를 예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침묵을 지키시던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아버지가 여기서 직장 생활을 오래 하셨고 큰아들이고 첫 결혼인데.. 여기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비둘기 같은 사람이다. 거침없고 거칠어 보일 때도 있지만 큰 소리 내는 걸 싫어하고 보노보노한 상태를 지향한다. (정말입니다) 그런 나였지만 여기서 머뭇거리면 우리의 합의안은 도로 아미타불이 돼 버린다는 위기의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희 아빠도 30년 넘게 회사 다니고 계세요. 저도 저희 집 첫째고 개혼이에요, 어머님."
에어컨을 잠시 꺼도 좋을 만큼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따뜻했던 식사와 생일 케이크가 오래전 일처럼 아득했다. 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말대답'과 '팩트 전달' 사이에 위태롭게 걸친 외줄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 생각에 동의하는 것처럼 얼버무리고 뒤에서 이제 어쩔 거냐고 똘이를 닦달하고 싶지 않았다. 들으실 때는 다소 마음이 상하시더라도 길게 보면 이게 맞다는 확신도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비둘기답지 않게 단호했던 이유는 결혼이 그만큼 큰일이었기 때문일까.
"초롱이는 집에 가서 부모님 언제 시간 괜찮으신지 한 번 여쭤봐라. 결혼식은 이쪽에서 하는 거로 생각해보고."
자리를 서둘러 정리하시려는 아버님 말씀에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드렸다.
"저희는 꼭 A시에서 하고 싶은데 아버님, 어머님도 다시 한번 생각해주실 수 있으세요?"
"... 일어나자."
결혼은 신랑, 신부가 아닌 양가 부모님을 위한 행사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과연 그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똘이와 내가 만나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없었을 결혼식에 정말 우리는 이 정도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걸까.
두 분이 계신 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스 대절 등 방법이 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조금은 이해해주실 줄 알았는데 완강한 똘이 부모님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