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로 가는 문을 열다
한 달이 흘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똘이와 평소처럼 맛있는 걸 먹고 떠들면서 네 번의 주말을 보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똘이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두 분께서 마음을 바꾸실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볼까 싶기도 했다. 한 3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똘이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허락이라기보다는 똘이 생일 이후 입을 굳게 다문 우리를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시다가 포기하신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조건이 있었는데 장소를 내주실 테니 시기는 두 분이 원하시는 때에 맞추라는 것. 평소 몸이 약하셔서 여름과 겨울을 힘들어하시는 어머님 뜻에 따라 결혼은 따뜻한 봄에 하기로 했다. 날짜는 엄마가 용하다는 점집에서 받아오셨다. 잠시 멈췄던 결혼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A시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부터 우리에게는 점 찍어둔 예식장이 있었다. 몇 해 전 똘이의 제일 친한 친구가 유부남이 된 곳인데 위치도 괜찮고 음식도 맛있는 곳이었다. 바쁜 똘이를 대신해 예식장에 전화를 걸었다.
"내년 *월 *일에 예약 가능한가요?"
"네, 신부님~ 여유 있게 연락하셔서 원하시는 시간대에 예약 가능합니다. 신랑님과 방문하셔서 상담받아보시면 어떠세요?"
전화 한 통 걸었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신부님'이 되어 있었다. 물론 똘이는 자동으로 신랑님. 취재, 섭외를 위해 허구한 날 전화통을 붙드는 직업을 가졌건만 입이 바짝 말랐다.
"아, 네, 그... 상의를... 해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내 입으로 신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똘이와 예식장을 찾았다. 자주 지나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 그렇게 낯설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됐다. 공주님이 사는 성에나 있을 것 같은 크고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우리 앞에 '본격 유부'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쓰앵님'과 비슷한 이미지의 실장님께 상담을 받았다. 쓰앵님은 어떤 패키지가 있고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봄은 성수기라 비수기보다는 가격대가 높았다.
다른 예식장을 알아볼 욕심도 없었지만 당장 계약할 생각도 없었던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쓰앵님 앞에 나란히 앉아 눈만 찡긋거려서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작전 타임이 필요했다.
"저희끼리 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요. 얼마든지 하셔도 되고 다 되시면 불러주세요."
쓰앵님이 나가시고 조그만 방에 남겨진 우리는 앞에 놓여있던 커피와 보리차로 마른입을 축였다. 똘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비싸진 않은 거 같은데?"
"그래? 기본 패키지로 계약할까?"
"그럴까?"
똘이는 뭔가를 살 때 몇 날 며칠 검색하고 비교한다. 나는 정반대인데 예를 들면 작년 똘이의 생일 선물로 지갑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을 때 이런 식이었다.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거로 세 개만 보여주세요."
직원분이 꺼내주신 지갑들을 보고 3분 만에 결정했다. 오래 고민하는 걸 싫어하고 어차피 세상 모든 지갑을 볼 수 없다면 내 앞에 있는 것 중에 제일 나은 걸 선택하자 주의다. (이게 과연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이날은 단 세 마디로 계약을 결정했다. 주변에서 성수기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돈 천만 원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겁을 집어먹고 왔는데 스‧드‧메 기본 패키지 가격은 400만 원이었다. 고급은 훨씬 비쌌는데 어차피 우리는 뭐가 더 나은지도 모르니(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이 없어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게 비싼 건지 싼 건지 감도 없고 예상했던 것보다는 저렴하니까 괜찮아 보였다. 쓰앵님과 다시 마주 앉았다.
"어떻게 잘 상의하셨어요?"
"기본 패키지로 계약할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고급 해봐야 아무도 몰라요."
의외의 칭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는 입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건가. 아니면 못 미덥게 생긴 우리가 기본이라도 한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신 건가. 다시 한번 기본 패키지의 주요 내용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오늘 계약금을 조금 주시고 나머지는 예식 날 주시면 되는데.. 카드로 해드릴까요?"
앞서 대부분의 설명은 나를 보면서 하시던 쓰앵님이 똘이를 향해 물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똘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제가 해야 할 일은 결제인가 보네요."
입사하면서 만든, 아직 영문 이름과 카드 번호에 금박도 벗겨지지 않은 신용카드로 시원하게 백만 원을 긁었다. 계약서와 함께 봉투를 하나 건네받았다.
"시기 별로 뭘 하셔야 하는지 정리한 책자를 같이 드릴게요. 6개월 전에 상견례, 석 달 앞두고는 뭐, 두 달 앞두고는 뭐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하나씩 체크하시면서 빠뜨리는 거 없게 잘 챙기시고요. 저희 쪽에서 진행하는 거는 맞춰서 연락드릴게요."
결혼 무지랭이들을 위한 교과서였다. 중구난방으로 듣던 결혼 지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할 게 너무 많아서 순식간에 질려버렸다고 할까. 재빨리 책을 다시 봉투에 넣고 예식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