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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Nov 24. 2020

난 슬플 때 볼펜을 사

현겸이에게 힙합이 있다면

 기억에 없는 돌잔치 날, 나는 연필을 잡았다고 한다. 대단히 우연한 일이지만 부모님이 장녀에 학구열을 품게 만든 아주 미약한 불씨가 아니었나 싶다. 어린 딸이 글씨를 곧잘 쓰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무척 뿌듯해했다.

 "네가 그때 괜히 연필을 잡은 게 아니라니까. 아빠 닮은 것도 있겠지만."


아부지 글씨 자랑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공부를 잘하려고 연필을 잡은 건 아니고 자의식이 없을 때부터 필기구를 좋아했던 거 같다. 혼자 문방구에 다닐 나이 즈음부터 나는 특히 샤프에 집착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열심히 모은 샤프 사십몇 개를 큰 필통에 가득 채워 매일 학교에 들고 다녔다. 쉬는 시간마다 꺼내 보고 흐뭇했던 추억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필기구 사랑은 계속됐다. 마침 또 직업이 작가라니. 펜, 샤프, 연필에 돈 쓰는 데 이 얼마나 좋은 명분인가. 여기에 경제력까지 생기면서 나는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이 열심히 필기구를 사재꼈다. 해외에 나가도 몇 자루씩 꼭 챙겨왔다. 이걸 모아 놓으니 양이 어마어마해졌다. 신혼집 구경을 오셨던 아버님은 거실 한구석에 숨겨 놓은 연필꽂이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셨다. 

 "우리 며느리, 작가님이라 그런가 연필이 어마어마하네."


이건 너무 일부예요, 아버님


 요즈음 회사 일이 힘들었다. '문구점 가야지, 가서 마음을 좀 달래고 와야지' 생각만 2주를 했다. 꾸역꾸역 참다가 결국 폭발했고 남편한테 하소연하면서 펑펑 울고 말았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여름부터 미뤘던 휴가를 내버리기로 했다.

 지각하든가 말든가 출근길에 대형 서점에 들렀다. 곧장 문구 코너로 가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상은 어떤 게 있나 둘러보다가 파랑 볼펜 세 자루를 골랐다.

 '그래, 이 정도면 휴가 전까지 버틸 수 있겠어.'

 죽기 전에 이 많은 걸 다 쓸 수 있을까 걱정된다. 너무 낭비하는 건 아닌가 죄책감도 든다. 그러다가 황폐해진 심신을 다스릴 수 있다면 이 정도 소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합리화하고 만다. 안 살 수는 없고 열심히 쓰면 되겠지.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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