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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Dec 21. 2020

카드를 쓰는 시간

2020년을 보내며

 3년 전부터 연말에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카드를 골라 편지를 쓰고 우편으로 부치는 과정은 꽤 번거롭지만 한해를 마감하는 의식이 되었다. 평소에는 간지러워서 할 수 없는 말을 한 줄 한 줄 적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제대로 전달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연말 분위기는 서점에 모여 있었다. 새해를 준비하는 다이어리 코너는 지나쳤는데-지금 있는 것만 해도 환갑까지 쓸 수 있을 듯-반짝반짝 예쁜 카드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아마도) 엄마가 김장할 때 배추를 고르는 마음으로 몇 장을 골랐다.   

  

 일요일 아침, 눈을 뜨니 7시 40분이었다. 더 누워있을까 고민하다가 자리를 털고 거실로 나와 며칠 전 사둔 카드를 꺼냈다. 방에서 남편이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드 쓰는 데 이보다 좋은 배경음악이 또 있을까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딱히 건너뛴 기억이 없으니 남편에게 쓰는 열세 번째 크리스마스 카드다. 한 집에서 무사히 첫해를 보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이사를 하느라 만신창이가 됐던 (남편은 A형 독감에 걸렸었다.) 작년 이맘때도 생각났다. 올해는 비록 집 밖에 나갈 수 없겠지만 둘이서라도 연말을 누리자고 적었다. 

 최근 번갈아 가며 아팠던 엄마, 아빠에게는 시작부터 끝까지 건강 타령을 썼다. 연말에 액땜했다 생각하고 우리 새해에는 손끝 하나도 아프지 말자고. 코로나 끝나면 (동생은 강아지를 봐야 하니까) 셋이 놀러 가자고. 

 동생한테는 적다 보니 잔소리 대잔치가 되었다. 술 좀 적당히 마셔라, 간염 주사 언제 맞을 거냐, 맨날 입으로만 예쁘다고 하지 말고 똥개 산책 좀 시켜줘라 등등. 맨 마지막 줄에는 '귀여운 누나가'라고 썼는데 동생 표정이 상상이 된다. 내년부터 카드를 수신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직접 우체통에 넣을 수도 있지만 집배원님께 받는 게 더 반갑지 않을까 싶어서 출근길 우체국에 들렀다. 쉽지 않았던 2020년을 무사히 보내고 이렇게 카드를 부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더 잘 써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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