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13년 전의 나에게

22.10.07

by 치슬로

나는 점심 먹고 테헤란로를 한바퀴 빙 도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갤버즈를 귀에 꽂았다. 서울 집 앞보다 이파리는 작지만 키는 한 뼘은 더 크고 둘레도 몇 아름은 더 커보이는 플라타너스들은 줄지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가을 아니랄까봐 벌써 잎맥 끝부분은 노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러브홀릭스의 Butterfly가 흘러나왔다. 평소 굳이 찾아 듣진 않지만 한 때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을 가득 메웠던 노래.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이 노래의 가사를 프린트 해 뽑아주시며 따라부르게도 많이 시키셨고 때론 무릎팍도사 안철수 편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그 당시는 안철수 신드롬이 불 때였다. 그분의 이미지가 지금과는 상당히 많이 달랐다.) 가사도 노래도 늘 좋았고 다 좋았지만 내 삶에 와닿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때의 나는 거의 죽어있는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수원의 어느 고등학교 교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에 누군가는 교실 뒤 책장에 숨어 세상이 무서워 매일 조용히 운다. 명문대를 못 갈것 같고 살기 무섭다고 담임 선생님에게 말한다. 끊임없이 죽을 생각을 하지만 죽을 용기가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반에서 성적은 바닥을 긴다. 부모님은 그를 다그치고, 정신을 못 차린다며 폭언을 하고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잡는다. 학교 선생님들은 성적이 안 나올 거면 이 학교에 있을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옆반 친구와 나누던 교환 일기가 유일한 삶의 구원이었던 나날들.


사실 고등학생 때의 기억은 몇 개 없다. 많은 기억들이 저 장면 안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재수할 때가 더 행복했던 이유는 고등학생 때처럼 매일 울지 않고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던 사람은 우습게도 두려움 덕분에 30대 어느 자락을 테헤란로에서 맞이했다.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
후회 속에 감춰진 너를 못봐,
나는 알아, 내겐 보여
그토록 찬란한 너의 날개


아마 그 때의 내 모습만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놀라운 풍경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멀쩡하게 회사에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지난 4년간 먹고 끊기를 반복하던 항우울제와도 완전한 이별을 고했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지난 20대와 30대 초의 시간은 10대 시절이 나에게 남겼던 지독한 상흔과 몸부림치며 결판을 내는 과정이었다.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으나 누가 인생을 지배하게 할 것이냐의 싸움. 매번 성공하진 못했지만 죽음과 삶, 안주와 성장 속에서 삶과 성장을 택했고 여기까지 가까스로 올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는 아주 먼 미래에서 과거로 5차원 태서랙트 공간을 통해 눈물겨운 신호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스포가 될 수도 있으니 더 말하진 않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미래의 내가 13년 전 나에게 노래를 통해 어떻게든 닿고 싶어하는 그 모습이. 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사실 넌 너를 싫어하고 죽고 싶다 말하지만 미래에 사는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하다고. 넌 빛이 나는 존재니까 성적과 대학 이름이 우상이 되는 그 세상 안에 너를 가두지 말라고. 비록 지금의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너의 가치를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생각보다 사회적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