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에서 취업까지, 내 이야기
22.10.10
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이다. 써놓고보니 정말 내가 영어영문학을 하긴 했나 비현실적인 느낌부터 들지만 맞다. 나는 영문학도였다. 내가 간절히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많은 재수생들이 그렇듯 나 역시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정했다. 입시에서 이미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터라 이제 더 이상은 모험을 할 수 없었고 가군은 무조건 붙는 '보험', 나군은 내가 나온 학교와 전공, 다군은 그래도 좀 가보고 싶던 학교를 썼다.
당시 나군 우리 학교에서 쓸 수 있던 제일 높은 과는 경영학부였지만 나는 지적 허영에 물든 스무살이었으므로 경영학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는 취업 후 얼마 안 되어 깨닫게 되었다) 학문의 전당에서 인문학은 해야겠는데 내가 공부하고 싶던 미학과 가장 가까운 전공이자 두번째로 높은 과가 영어영문학부였다. 그래서 거길 썼다.
고등학생 땐 왜 그리 미학이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큐레이터를 더 하고싶었던 것 같긴 하다. 한국엔 미학 전공이 설치된 대학이 딱 두개 뿐이다. 서울대와 영남대. 홍익대 예술학과도 비슷한 곳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 나는 서울대 미학과에 정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때 들었던 철학 수업들은 내가 정말 미학(도 철학의 한 갈래니까) 을 하고 싶어했는지 그 저의를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고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가 사람 여럿 망쳤(?) 다는 말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철학과 미학이 재밌었던 건 저자가 책을 재미있게 써서 그렇게 느꼈을 뿐, 그 학문 자체가 결코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에 갈 성적이 안 되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학과 공부도 그리 열심히 하진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머물렀던 3학년 2학기와 4학년 1학기를 제외하고 4년 내내 A+을 받은 적이 손에 꼽았고 보통 B와 C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영미 소설과 여성주의, 문학적 상징을 탐구하는 공부는 재밌었지만 영문법과 영미시는 정말 나와 안 맞았다. 시험과 과제를 꼬박꼬박 다 해가도 C+이 나올 만큼이었으니.
전공보단 다른 재밌어보이는 수업을 더 많이 들었다. 이젠 다 까먹었지만 대학생 때 스페인어와 독일어, 라틴어에 한번씩 다 손을 댔고, 종교학은 정말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볼 정도로 재밌었으며, 원래 오랫동안 서울문화재단 취업을 생각했으니 문화관광학 수업들도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1년간 뒷일 생각 안 하고 미국에서 적당히 학점 따다 온 사람에겐 졸업까지 필요한 시수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고(그것도 4학년 2학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 우리집 경제 상황으론 추가학기로 복수전공을 모두 마무리하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 만나던 사람은 나와는 달리 졸업 후 취직이 나에 비해 쉬운 전공이었고, 나는 절대 직장인과 학생으로서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동등한 직장인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4학년 2학기에 남은 학점이 20학점이라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 그 당시 나는 좀 미쳤던게 맞는 것 같긴 하다. 그동안 미뤄뒀던 전공 수업들을 신청해놓고 미래가 막막해 강의실에서 멍을 때리던 나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타파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관심있던 플랫폼 스타트업을 다 찔러봤다. 인턴을 하고 싶다면서. 그러다 얻어걸린 곳이 이후 3년간 다녔던 내 첫 직장이 되었다.
아무튼 직장을 잡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취업계(!) 를 핑계로 교수님들과 딜을 해서 4학년 2학기를 가까스로 마쳤다.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시간을 지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 어쨌든 저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 최대 장점은 어디다 갖다놔도 적응해서 뭔갈 해내는 야생성이다.) 의미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근데 그 시간 속에서 전공이 뭔 의미가 있었냐고? 사실 날 포함해서 영어영문학 전공자들만큼 전공이랑 관련없어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정말 영문학으로 학위를 따거나 영어 교재 연구를 하고, 문학을 하는 동기와 선배들도 있지만 HR을 하거나 UX 디자인을 하거나 공기업을 다닌다거나 아니면 나처럼 기획과 운영을 모두 하는 IT 잡부(?) 도 있다. 다만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영어영문학이란 큰 틀 안에 숨은 수많은 사상과 연구 분야들과의 만남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고, 그 과정이 이 모든 선택을 인도하였다고 생각한다.
영문학 안의 여성주의, 정신분석학,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들은 당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돕겠단 관심사와 맞물려 첫 직장을 선택하게끔 했고 첫 직장을 통해 지금의 직장까지 오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4학년 2학기때 재밌게 들었던 로컬라이제이션이란 분야는 IT 분야에선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Connecting the dots', 인생의 수많은 점들이 한데 모여 큰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우리는 그 과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실 나 자신도 아직 내 전공을 포함한 많은 일들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완전히는 모른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다만 다음달에 만나게 될 모교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는 하고 싶다.
"전공의 쓸모는 모두에게 그리 명징하게 드러나진 않습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영어를 많이 써볼 수 있었음에 기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언젠가 뒤돌아보면 강의실의 한 장면이 우리의 큰 선택을 만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게 될 겁니다. "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