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속 언어의 상실, 창조, 허세 그 어딘가 04.03
최근 일하면서 들은 음악들을 정리해보니 거의 프로그레시브 락, 포스트 락, 슈게이징이었다. 가사가 거의 없거나 잘 안 들리는 음악을 들은 셈인데 어쩌다 예전엔 찾아 들을 생각도 안하던 음악을 이젠 제 발로 찾아 듣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도 정말 신기할 때가 많다.
특히 불싸조와 조월의 슈게이징을 들으면서 신기한 건 가사가 제대로 안 들려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계속 듣고 싶어지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월의 <아니, 이미> 를 일하면서 계속 돌려 들었다.
그런데 음악도 하나의 소통일진대, 어쩌다 말도 없이 20분씩 연주만 하는 포스트락이나, 이름 그대로 자기들 신발만 쳐다보면서 (shoe-gazing) 웅얼대는 음악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지 오늘은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조월의 음악을 듣다 보면 청량한 음들 속에 울려퍼지는 말의 울림을 제일 먼저 잡아내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듣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은 가사가 너무 잘 들리지만(?!) 식목일이나 아니, 이미 같은 곡들은 정말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워서 가사는 제쳐두고, 나도 모르게 그 울림에 주목하려고 노력하면서 듣게 되었다.
독일에 처음으로 갔을 때를 떠올려 본다. 뮌헨에서 베를린 가는 비행기 갈아타는 시간이 45분밖에 안 되어서 잔뜩 긴장을 하며 탔었는데, 역시나 인천에서 비행기가 1시간이나 늦게 이륙하는 바람에 이미 비행기를 놓치는 건 기정 사실이 되어버렸다. (참고: 베를린은 인천에서 직항이 없다.) 다행히 루프트한자에서 표를 다시 끊어 주고, 뭐라도 사먹으라며 5유로짜리 바우처를 주길래 국내선 연결편을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사며 독일 사람들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강하고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발음과 한국어로는 '히' 라고밖에 쓸 수 없는 새 나가는 발음들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했다.
공항을 벗어나서 베를린 시내에서도 필요할 땐 영어를 쓸 수 있으니까 뭐 그렇다 쳐도, 알 수 없는 말들 속에서 울림과 새어나감 사이에만 일주일 내내 주목할 수 있는 경험은 참 경쾌했다.
Tierra Whack의 <Whack World> 를 한 때 많이 들었었다. 15분짜리 컨셉앨범/뮤비라는 형식도 독특했고, 음악도 좋고, 무엇보다도 발음을 다 뭉개버리는 '멈블링 랩' 을 여기서 처음 보고 신기하고 재밌어서 많이 들었다.
멈블링 랩은 그 자체가 무엇을 의도하고 한 것은 아니라곤 하지만 어떤 '딜리버리' 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분명해 보인다. Tierra Whack의 음악을 들으며 내가 제일 많이 했던 행동은 가사를 배로 집중해서 듣는 거였다. 중간 중간 아는 단어가 들리긴 들리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 알고 싶어져서... 아마 이걸 의도했나? 여튼 요점은 이 행위 자체가 짜증나지 않고 재밌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게 다 들리지 않아도 딱히 문제 없겠다! 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도 포함해서.
다시 독일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그토록 모르는 말에 매일같이 노출되는 환경에서 왜 '경쾌함' 을 느꼈냐면 결국엔 나는 언젠가 그 곳을 금방 떠날 여행객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아마 거기서 계속 살 예정이었다면 난 모든 것이 모르는 것 투성이란 사실에 절망을 느꼈을 것 같다. 음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처음 오든 두 번째 오든 잠깐 머무를 여행객의 입장으로 음악을 만나고, 그 음악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가 아닌 경험의 언어, 발견의 언어로써 통용되므로 우리는 흔쾌히 뭉개지는 발음과 안 들리는 가사에 관대해지는 것 아닐까.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견하기 위하여 왔으므로.
한편 말을 뭉개다 못해 이제는 새로운 말을 창조해내는 음악들이 있다. 일본 영화/애니메이션 음악의 거장 칸노 요코가 바로 그런 음악의 선두주자인데... 칸노 요코가 작사, 작곡한 음악들 중엔 소위 '칸노어(하나모게라어)' 가 쓰인 음악이 상당히 많다. 칸노어 음악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인 <Sora(천공의 에스카플로네 ost)> 를 들어보자.
불어 느낌이 나지만 불어가 아니다. 영어도 아니다. 어디서 들은 바로는 한 '미니언즈' 언어 만들듯 한 몇가지씩 조합했지만 어법은 비공개고, 뜻만 공개를 한다고 한다. 변태..내 기억으론, 칸노 요코가 가브리엘라 로빈이라는 가명으로 직접 노래를 부를 땐 거의 칸노어로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Sora만 들어도, 꿈꾸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그런 언어를 만들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론 아니 선생님... 똑똑한 건 음악으로만 뽐내셔도 돼요... 란 생각도 든당) 꿈을 꿀 때 우리가 듣는 언어들은 대개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묘하게 말이 안 되는 언어들이다. 웃긴 건 꿈에서는 그 말을 분명 이해했는데,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하고 헛웃음을 짓게 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어느 세계에선 그 말을 이해했다! 지금의 현실이 그 세계가 아닐 뿐. 그래서 칸노 요코의 음악 언어는 우리를 제 3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어떤 숨은 가능성이자 포털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잘 안 찾지만 예전에 베이퍼웨이브 음악들을 꽤나 들었다. Windows 95와 98, 아그리파와 줄리앙, 해변의 이미지 등 90년대 느낌이 물씬 나는 키치한 것들을 잔뜩 배열해 놓고 그 당시 음악을 엄청나게 샘플링해대는게 베이퍼웨이브의 문법인데, 그 문법에는 일본어와 한글(일본어보다는 덜하지만) 로 뭔가를 표기하고 쓰는 것도 포함이다. 아시아 사람 입장에선 Asian Fever 같은 건가 싶어 좀 별로이지만, 실제로 정말 많이 쓰긴 쓰더라.
By Daniel Oliva Barbero - "Evolution" and life in vaporwave flavours., CC BY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81610180
Blank Banshee라는 캐나다 베이퍼웨이브 아티스트가 있다. 그의 곡 Eco Zones 뮤비를 보다 보면 좀 드문 케이스이긴 한데 한글이 어떻게 베이퍼웨이브의 문법 체계가 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대체 왜 Eco Zones가 해적 만이야...?)
진지하게 그래픽과 곡 작업을 했을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사실 이 뮤비를 볼 때마다 꽤나 많이 웃곤 한다...
마치 '신흥호남향우회' 원피스를 입었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는 기분이랄까??? 일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할까 싶다. (일본어 사용의 극단적인 예를 보고 싶다면 베이퍼웨이브 명반이라 불리는 Macintosh Plus - Floral Shoppe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당)
베이퍼웨이브의 주요 소비층이 북미권이라 그랬을지 몰라도, 일본어나 한글은 그들 입장에서 가장 신비스럽고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요소였을 것 같다. 아마 넣으면서도 영어가 이런 식으로 표기될 수 있다니!! 하고 너무 신기해했을 것이고 아무에게나 감히 내 작업을 해석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굉장한 장벽이자 아우라로써도 기능했을 것 같다. 그런데 한국어 화자인 나에겐 이 모든 장벽과 아우라가 해체되어 버리고, 어떤 경우엔 허세로밖에 안 보이니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ㅋㅋㅋ 갑자기 나무위키 불싸조 항목에서 읽은 얘기가 생각난다.
"가사는 나도 잊어먹었다. 적어놓은 종이를 잊어버려서 이제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다. 사실 우리 노래에 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출처: 나무위키 '불싸조' 항목)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 하고 열심히 집중해서 한상철 씨가 부르던 가사를 듣던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발언이었다. 음악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외감과 신비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음악 언어와 배경을 너무 잘 알아서도 안되는 것 같다. 역시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거려나.
요즘 들어 생각해보니 멍멍이 가수 T.K의 나비보벳따우가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었다. 사람들이 하도 듣다 못해 1시간 연속, 10시간 연속 버전을 만들기까지 하는 건 T.K 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몰라서일거란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물론 종종 그 가사의 의미를 파헤치거나 그럴싸한 해석을 가미하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매일 듣는 사람들에게 그건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말에 지친 사람들에겐 때론 일상 언어가 무력화되는 다른 세계로의 여행도, 꿈의 세계에서 오는 위로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언어가 쉽사리 해석되지 않도록 미학적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 말을 잃은 음악들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