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로 이사하며 느낀 소회들, 명동3구역을 기억하며
금요일부로 회사가 드디어 을지로 시대를 열었다.
오랜 시간 - 약 1년 7개월 - 머물던 홍대와의 이별은 낯설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을지로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극을 필요로 하던 내 마음을 못내 설레게 했다.
한편 회사가 을지로로 이사한다는 말을 들은 아빠는 '4대문 안에서 직장을 다녀보는 건 큰 복' 이란 말을 해 주셨다. 서울에서 4대문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진지는 꽤 되었지만... '나도 문 안에 들어와 본격적인 직장인이 되었다' 라는 치기어린 자부심이 솟아올랐다.
그 외에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사실들은 많았다. 을지로 안에서도 지은 지 얼마 안된 시설 좋은 새 빌딩에 입주한다는 사실. 사무실 창 밖으로는 남산과 명동성당이 내려다보이는 끝내주는 뷰,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빌딩을 나서면 바로 앞에 있는 광역버스 정류장과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 코워킹 스페이스에 입주했기 때문에 다른 사무실의 소음과 예전보다 조금 더 좁은 업무 공간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의 흠이었지만 거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잠깐 그 앞 광역버스 정류장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은 한동안 먼 통근 거리때문에 본가를 떠나 마포에 머무르고 있지만, 마포에 이사오기 전까지 명동성당 앞 중앙 광역버스 정류장은 내 거의 모든 일상과 함께하는 곳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충무로에 있는 교회에서 경기도의 집까지 가려면 퇴계로를 가로질러 샬트르 수녀원 옆 삼일로 언덕길을 헥헥대며 오르고, 내리막을 뛰달리듯 내려와 바로 그 정류장에 다다르곤 했으니까. 나는 늘 언젠가는 정류장 이름에는 항상 쓰여 있으나 가보지는 못했던 중앙극장에 가보리라 생각하곤 빨간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대학생때는 과제와 이른 기상시간에 파김치가 된 내가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리던 곳이 그 정류장이었다. 그리고 다시 삼일로 언덕길을 죽을상을 하고 거슬러 올라가 4호선을 타고 학교를 갔었더랬지.
어느 순간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중앙극장' 이란 이름이 지워지고, '남대문세무서' 라는 새로운 이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한창 재수생으로 정신없이 살던 2011년에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묵은 기억을 꺼내보게 되었다.
"명동3구역 재개발은 제 2의 용산참사며 제 2의 두리반 사태"
2011년 당시 명동 앞 상황을 기술한 어느 기사의 내용이다.
지금 우리 회사가 입주한 빌딩 자리는 한때 '명동3구역' 이라 불리던 재개발지역이었다. (명동4지구랑 혼용되어 쓰이는 것 같은데, 정확한 구분은 잘 모르겠다) 결국 2011년 말에서 2012년 초 중구청의 주재로 세입자와 개발 주체간의 갈등이 해결되었고 25층짜리 오피스빌딩은 높게 높게 올라가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 곳에는 더이상 영업하지 않는다고 창문마다 붉은 X자를 죽죽 그어놓은 중앙극장과 농성장이었던 '카페 마리'를 거점으로 용역과 싸우던 세입자들, 그리고 붉은 글씨로 뒤덮인 펜스가 있었다. 당시 중앙극장 앞은 이명박 정권의 한미 FTA 정국으로 시끄러웠던 서울 도심 분위기와 맞물려 사뭇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수능을 치고 며칠 뒤였던 것 같은데, 그 당시 싸이월드에 쓴 일기를 보니 재수생이었던 나는 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명동 일대를 보고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터를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몸부림은 거칠다. 그리고 그 곳이 스스로 일군 곳인데다 어느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의미를 발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 절규는 거세진다. 누군가는 보상금을 더 주면 끝날 일이 아니냐고 비웃듯 묻겠지만, 글쎄... 내 기억속에는 늘 있다고 믿던 일들과 장소가 해체되어 잔해만 남고, 이제는 그곳을 함께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런지. (그렇다고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게다가 그 시간과 장소성을 상실하게 되면 무엇이든 절대 예전과 같지 않다! 어찌되었건 나는 명동3구역 안에 있던 저렴하고 맛있는 국밥집이 다른 곳으로 크게 이전한 후, 예전과 같은 맛이 좀처럼 나지 않아 가고싶지 않아졌다는 어느 블로그 글을 보고 이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박원순 시장에게 '제발 내 일터만은 지켜줄 것' 을 부탁하던 명동3구역의 어느 가장의 편지는 잘 전해졌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일터와 기억을 허문 자리에 나는 새로운 일터를 만들었고, 다시 새로운 기억을 그 장소에 덧씌우려 한다. 그들이 오랜 시간 누리고 꿈꿔왔을 소박한 1층짜리 행복 위에 나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빠른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0몇층짜리의 '고상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기실 누군가의 터전을 한번도 무너뜨리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하냐? 라고 물었을 때 경기도의 신도시들을 어린 시절 내내 경험한 나는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당연한 것들은 누군가의 당연함을 쫓아낸 자리에 다시 만들어진 것들이니까. 단절된 기억위에 다시 쌓아올리고 있는 기억들 역시 온전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다 알수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모를 봉인된 기억 위에 기생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 역시 켜켜히 쌓인 기억 위에 새 터전을 짓고 살겠지. (아빠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대문구 전농동 주택가 일대는 이미 몇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엔 대단지의 래X안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니 나는 기억과 삶에 빚진 자다. 그 전농동 아파트에 입주할 이름 모를 사람도 아빠와 나에게는 빚진 사람일 것이다. 금전적인 빚이라면 벌어서 갚겠는데, 이 빚은 무형의 빚이라 사실 졌다는 사실조차 알기가 힘들다. 당사자에게 직접 갚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기억과 삶에 빚진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작게는 그 곳에 살았던 무생물부터, 크게는 사람에게까지. 우리 모두는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기억이 스러져간 곳에 살았던 한 생애에 대하여 엄숙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애도하겠지만, 그 삶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숨쉴 생명을 가졌을 것이기에.
그리고 작게는 서울 안에서, 크게는 한국 여기저기에서 너무도 쉽게 기억과 삶을 탈취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기억하고 침묵하지 않기로 하는 것. 종로구 무악동의 옥바라지 골목이나 서대문구 아현동을 기억하는 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항상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나는 운이 좋아 많은 기억을 잃지 않았을 뿐이다.
내일도 변함없이 옛 중앙극장 앞 정류장은 버스와 사람이 뒤엉켜 복잡할 것이다.
잠들어있는 누군가의 기억 위에 빚진 자들의 기억은 쌓이고, 나는 그 기억에 대해 예의 지키며 살고 있는지.
*---------(2017.07.22 추가) ----------*
회사가 입주한 대신증권빌딩 에스컬레이터 한 켠에 이 자리에 있었던 중앙극장을 아카이빙해둔 곳이 있다는 걸 동료 덕택에 처음 알았다. 작은 유리 판 속에 영화 필름 몇 롤과 2007 서울독립영화제 현수막이 덩그러니 담겨 있는데, 그 곳에는 그 아카이빙된 필름과 현수막이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앙극장을 기리기 위함이란 그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다만 그 옆에 아이러니하게도 '대신증권빌딩' 의 머릿돌이 있었다. 마치 중앙극장을 굴복시키고 일어난 자신이 아주 정당하다는 양.
보자마자 참 예의없다고 생각했다. 없으니만 못한 아카이빙에다 그 옆에 바로 대신증권빌딩 머릿돌이라니. 이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님을 바로 알아채고 화가 났다. 기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입주한지 2주가 넘도록 가까이 있던 그 아카이빙의 존재조차 왜 알아채지 못했는지 나에게도 화가 났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쟁취한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진짜로 소중한 것들은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모른다. 나는 동료 S와 한남대교를 건너오며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월인공방 사장님이 익선다다 대표에게 최근에 받았다던 그 말도 안되는 문서를 떠올렸다.
어느 거리에는 금이 가고 흔들리고 먼지가 풀풀 일고 그 안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떠나는데
그 거리에는 사실 빚진 지도 모르는 / 외면하는 악덕 채무자들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