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신간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을 읽고

by 치슬로
"넌 참 빈틈이 안 보이는 사람이야."

이 말은 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전학 온 첫날엔 머리도 길고 무섭게 생긴 여자애가 하도 웃지를 않아서 일진이 전학온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나는 누군가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누군가에게 어렵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사회성 없고 말이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얼굴에 하나 둘 나기 시작하던 여드름과 그때부터 낮았던 목소리 때문에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내 속에 파고들며 벽을 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무도 날 제대로 알아주지 않을거란 부정적인 인생 예측은 덤으로 가져갔고. 어쩌면 나는 내 금을 함부로 넘나드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란 것을 굉장히 일찍부터 알았던 것 같다.


사회에서도 피구를 할 때처럼 금을 밟는 순간 "너 아웃!" 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회엔 금을 밟아도 나가지 않는 '반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당신 금 밟았어요" 라는 한 마디 조차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상황이 많다는 것을 커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 내가 맞닥뜨렸을 때 나의 대응은 그냥 넘어가기, 아니면 불같이 화내기, 아니면 다시는 보지 않기. 크게 이 세 가지로 좁혀졌던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난 뒤 혼자 방 안에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고 짜증나서 울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편,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내 삶에 등장한 페미니즘과 그 안의 미러링과 일종의 '용기' 라 불리는 도구들은 나에게 무례한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이자 무기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내가 스스로 잘못이라 돌려왔던 것들은 사실 내 잘못이 아니라 내가 '가스라이팅' 이라는 저열한 수법에 당한 것 뿐이었다는 일종의 깨달음도 얻게 되었었다. 그러나 무기가 있다고 다 전장에 나가서 잘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서툴어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치는 나에겐 본격적인 '매뉴얼' 이 필요했다. 그 와중 읽게 된 대학내일의 정문정 님이 쓰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은 나에게 용기와 지략을 동시에 선사해 준, 꽤 괜찮은 매뉴얼이 되었다.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이 책의 슬로건을 보자마자 정말 잘 썼다! 라는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개소리로 가득 찬 인생과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병존할 수는 있어도, 공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서, 특히 20대 여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네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개소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미 알지 않았는가? 당연히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공기처럼 떠도는 개소리들에게 (내가 들었던 희대의 개소리를 하나 꼽아보자면, "여자애가 그렇게 정치 좋아하고 그러면 남자애들이 안 좋아한다.") 단호히 대처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지략을 다른 이에게도 전수할 수 있다면 인생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쉬워질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정문정 님의 인생 경험담을 중심으로, 저자의 마음을 어렵게 하던 주변 환경과 용기를 꺾어놓는 이야기들에서 어떻게 저자가 걸어나오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때로는 가까이서 사랑과 용기를 주어야 할 가족이 "네가 그걸 어떻게 하겠냐" 며 나의 용기를 꺾고, 가족만큼은 못 되더라도 나의 기와 자존감을 살려 주어야 할 남자친구가 자존감을 온통 짓밟았다. 이럴 때마다 어떻게 "아니" 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 그 답은 바로 스스로를 믿는 힘과 단호함에 있었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가? 내가 바로 답이다


약자, 특히 여성에게는 항상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할 필요가 따라다닌다.

"내가 너의 그런 점 때문에 아프고 상처를 받아"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안 그래 보이는데? 난 그렇게 말하는 네가 오히려 네가 짜증나는데, 네가 피해자라는 걸 증명해봐" 라는 강-약 구도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회사에서도, 연인 관계에서도,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이 슬픈 장면들은 한 번 따라다니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는 데에 익숙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미안하다' 는 말과 친숙해진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의심하는 일에도 익숙해지게 된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도 저 사람이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맞는 것이겠지.. 하다가 자신을 잃게 되고, 동시에 불합리한 상황과 맞설 힘도 잃어버린다. 그런데 왜? 도대체 어떻게 내가 느끼는 것들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왜 정해진 답에 내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하는거지? 저자 정문정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누군가의 좁고 낡은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다 지쳐 울고 있는 언젠가의 내가 활자 저 편에서 스르르 떠올랐다. 보통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법> 은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무릎을 쳐 가며 읽곤 했는데, 울고 있던 내가 떠오르던 그 순간만큼은 책장을 덮고 잠시 눈을 감아버렸다.


핵심은 단호함과 나에 대한 믿음이다.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가 어떤 관계에서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두려워서 말하지 못할 때, 내가 나를 자꾸 의심하게 될 때, 그리고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게 될 때야말로(사실 진짜 미안하단 말은 내가 나 스스로한테 해야 한다!) 이제는 스스로가 더 단호해져야 한다는 신호일테다.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자존감이 도둑질당하는 슬픔에, 그리고 계속해서 무례함을 참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에 과감하게 'NO' 를 외쳐주자. 왜냐하면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이미 옳기 때문이다.


기실 나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원래부터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아직 두렵다면 내 말을 믿어 보라. 그리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법>을 읽어 보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한 단어로 축약해 보자면, 저자 정문정님의 진심어린 위로가 담긴 "어떤 상황에서도 널 믿어봐라, 괜찮다." 가 될 것이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물론 "생리해? 왜 이렇게 예민해?" 라고 말하는 부장님의 낯에 "그러는 부장님은 왜 그리 기분이 좋으세요? 몽정하세요?" 라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날리는 김숙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김숙도 처음부터 그런 경지에 올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에는 아직도 내가 "아니" 라고 말해야 할 상황인것을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상당수 존재한다. 당장 H 모 그룹 3남의 변호사 폭행 사건을 보라. 그리고 나는 아직 기사화되지 않은 수많은 직장 내 성희롱 이야기를 들어왔다. 또 누군가의 자존감 깎이는 연애와 결혼 이야기라면 누구든 자주 접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은 내가 들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무력해질 때가 많았다.


이 책은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한 완벽한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기실 사회 전반에 걸친 '무례함' 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이 이 책 하나만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음 두 가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바로 '낙숫물에 바위가 뚫린다' 는 것과 그렇다면 그 '낙숫물' 을 어떻게 집중적으로 떨어뜨릴 집중력과 끈기를 얻는가에 대한 것을 말이다.


믿음과 단호함을 배우면 내가 겪는 작은 불편과 불의에 더 이상 눈을 감고 입을 가리지 않는다. '프로불편러' 로 불릴지언정 내가 느끼는 아픔에 대해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된다. 한 마디로 입이 트이는 순간이랄까, 입이 트이기 시작하면 이제 더 이상 사회의 불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쌓아온 이야기와 서사는 언젠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물론 당장 모든 불합리한 상황에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다음 번, 다다음 번이라도 그 공고한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럴 힘이 나에게 있음을 알려주고 그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알려주는 '기초 회화 입문서' 와 같은 책이다. 실제 사례 중심으로 적용법도 친절히 알려준다. 꼼꼼히 밑줄 치며 소화하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나는 "벽에 부딪혔나요?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진짜에요" 라는 문장을 고등학교 시절 어느 블로그에서 보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보고 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떤 벽에 부딪혔다 느끼는지? 괜찮다.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할 수 있고, 저자 정문정 님도 그럴 것이다. 이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의 책장을 덮고 나면 당신도 말할 것이다. "아, 나는 잘못되지 않았구나. 나는 단지 벽에 잠시 부딪혔을 뿐이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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