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미꾸라지의 귀여움

목적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볼 때

by 치슬로

어쩌다 보니 염리동에


염리동에 처음으로 갔다. 아니 사실 처음은 아니고, 골목을 누벼본게 처음이라고 말하는게 더 정확하겠다.

친구들과 서울여성영화제 보기 전, 이대 앞 핫한 독립서점들을 좀 구경하고 싶어서 영화 시작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한 후, 이대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이대 앞 독립서점들은 정말 '이대 앞' 이 아니고, 이대역 '앞' 에 있는 염리동 골목에 거의 다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날도 더운데 언덕길과 골목을 누빌 자신이 없어져 포기할까 했지만, 내가 누구냐! 대학생 시절 정릉 골목길을 엄청나게 돌아다니고, 폭염주의보 내린 날에도 대전 구도심을 샅샅이 뒤지던 임선민이 아니던가. 일단 초원서점 위치를 확인하곤 바로 출발했다.


초원서점은 정말 염리동 꼭대기에 숨어 있었다. 이대역 5번 출구로 나오니 사람 많고 활기찬 이대앞과는 달리 오후 따가운 햇빛에 느릿느릿 기울어가는 적막한 동네가 펼쳐졌다. 여기도 똑같이 미용실 있고, 네일샵 있고, 빵집 있고 편의점 있고, 서점에 키덜트 샵까지 다 있는데 길 하나 사이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가. 초원서점은 언덕길을 한참 걷다가 또 꺾어 올라가야 있었다. 벌써부터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골목을 좋아하는 나는 내심 신이 났다. 요즘 보기 힘든 동네 세탁소 앞에 이불 널어놓고 햇빛 소독을 하는 전경부터 오래된 주택들, 3층짜리 주택의 나선계단 옆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그리고 너무나 귀여운 '현이양품' 가게까지...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여기가 한때 엄청나게 뜨던 염리동 소금길 골목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딱히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서울 핫플에 왔네? 더 신이 났다. 이제 몇 모금 안 남고 얼음과 함께 녹아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면서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에 당도했다.


하지만 초원서점은 없었다


엥? 근데 뭔가 이상하네. 분명히 있다던 초원서점은 보이지 않고, 오후의 적막한 골목의 끝엔 다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재개발지역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보니 폐업? 아니면 휴업을 한 것 같았다. 에라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주변에 있는 가게들이나 더 구경하다 가자 싶어 다시 천천히 내리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던 중 다시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아까 본 이불 널려있는 세탁소 가게 들 중 하나의 어항이었다.


특이하게도 어항을 실내가 아닌 실외에 두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 어항은 초등학교 때나 친구네 집에 가서 보았던 등나무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추억의 육각형 어항이었다. 그 안에는 삼다수 물통으로 보이는 물통이 머리 부분이 잘린 채 들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구피 여러 마리가, 그 바깥에는 무려 미꾸라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미꾸라지를 반려 생물로 키우다니?!


추어탕으로서의 미꾸라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반려 미꾸라지 이야기 하다가 추어탕을 이야기하자니 너무 잔인하지만...우리 집은 추어탕을 정말 자주 먹는다. 맞벌이 하는 바쁜 우리 부모님의 니즈에는 요즘 굉장히 잘 나오는 팩으로 된 국이나 탕이 제격인데 (맛도 엄청 괜찮다) 추어탕이 맛있어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추어탕을 먹는다. 서울식 추어탕은 남원식과 달리 뼈채 갈지 않고 미꾸라지를 통으로 삶아 나온다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먹는 건 남원식 추어탕이라 원래 이 음식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기 어렵다. 미꾸라지란... '추어' 라는 이름을 곰곰히 생각하며 거기에 있기는 했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사실 티비에서 추어탕 맛집을 취재할 때 신선함과 맛을 보장한답시고 정신사납게 미끄러져 다니는 미꾸라지 수백마리를 한번에 산 채로 갈아버리는(...) 현장을 나는 자주 보기도 했다.


그러니 미꾸라지란 생물이지만, 귀여워하며 키우는 물고기보다는 '식재료' 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었다. 그리고 수십, 수백마리가 엉켜 징그럽게 펄떡펄떡 미끄러져 튀어오르는 그 인상 때문에 나는 미꾸라지를 키운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저 어항 속의 미꾸라지는 가만히 물 속을 유유자적하며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사납기는 그 옆의 구피들이 더 심했다. 오히려 선비를 보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미꾸라지 관찰을 다 하다니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어항 사진을 찍고, 미꾸라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수염이 네 가닥 정도 달린 미꾸라지는 바닥에만 있지도 않고 열심히 어항 여기저기를 헤엄쳐 돌아다녔다. 내 인생에서 미꾸라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한 적은 없었는데, 가만히 본 미꾸라지는 그 수염과 인상이 정말 귀여웠다.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진기한 어항을 지켜보다, 세탁소 주인이 뭐라고 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려 다시 이대역으로 내려갔지만, '미꾸라지의 귀여움' 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건 인생의 여러 순간에 있어 나름의 큰 수확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식재료가 아닌 생명으로서 어떤 존재를 바라보고, 그 존재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문득 얼마 전 기사로 만난 "자유로로 탈출한 돼지 삐용이가 영원한 자유를 얻은 날" 이 떠올랐다. '비육돈' 이 아닌 사회성 좋고, 귀여운 돼지로서의 짧은 삶을 누리다 간 수퇘지 삐용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살면서 처음으로 '꼬마 돼지 베이브' 같은 픽션 말고, 논픽션으로써의 돼지에 대한 서사를 본 것이 처음이라 인상깊었었다. 그러던 내가 염리동에서 반려 물고기로서의 소임을 다 하고 있는 미꾸라지를 볼 줄이야. 갈려들어가지 않는 미꾸라지에 대한 서사를 발견한 것으로 이미 오늘 하루치 깨달음은 충분했다.


서울 어딘가에 숨은 '이상한' 보통 사람들


생물 채집하는 초등학생이 아니고서야, 미꾸라지 한 마리를 구피와 함께 키우는 세탁소 어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강제 철거된 아현동구역이 바로 옆이고, 곧 있으면 재개발지역 지정고시를 맞이할 것만 같은 적막하고 투박한 ('어름집' 과 이불을 밖에 널어두는 세탁소들이 아직 서울에도 있다.) 이 동네엔 지키고 싶은 사랑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이상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서울 떠나 지방 가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도 서울을 여전히 사랑하나 보다.


사족 1) 알고 보니 친구 중에 초원서점 단골이 있었다. 주인 분이 잠시 쉬고 오신다고... 조만간 가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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