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신이 내릴 때
그만 노트북을 덮고 침대로 가고 싶을 때 쓰는 글
도대체 글이 써지지 않아 노트북 폴더 여기저기에 완성되지 않은 파일이 쌓이고, 브런치와 페이스북에는 발행되지 못하고 임시 저장된 글만 늘어갈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어느 날 맨날 듣던 노래의 가사가 다르게 들려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갑자기 시상을 떠올리게 해 단 30분만의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가 있다. 이런 괴롭고 놀라운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글의 신' 의 존재를 믿게 된다. 한 편의 글을 완결하는 것은 그의 허락에 달린 것이 아닐 까 하고.
살면서 글을 써지게 하는 '글의 신' 이 모두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의 은총을 상당히 많이 받은 편이다.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전공 특성상 글을 써야 할 때가 많았다. 특히 시험기간이 그러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밑천은 없는데 어떻게든 B4 사이즈의 답안지를 양면으로 빽빽히 채워내야 할 때마다 글의 신은 나에게 거의 항상 기적을 내려 주었다. 물론 그 기적은 '글' 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글씨체' 에 기적은 내리지 않아 기적이 내린 시험지 위엔 흡사 지렁이 수 백 마리가 기어가는 것 같았지만.
회사에 들어가서도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했다. 마케터로 일했던 마지막 1년 동안엔 매주 보도자료와 연재, 홍보 건으로 길고 짧은 글을 하루에도 몇 편씩 써내야 했다. '활자에 깔리는 것 같다' 며 연신 딱딱한 사각얼음을 씹어대던 그 때에도 내 글이 그렇게 못 팔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때에도 그는 나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실수도 많이 했고 부족함도 많았지만 글을 향한 절박함이 마음 속에 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다 퇴사를 하고 더 이상 글을 쓰라는 요구도 평가도 사라졌을 때, 나는 때로는 해방감에 취해, 혹은 불안감에 온통 젖어들어 매일같이 그를 바라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그러다 정말로 글을 써야 할 때가 왔을 때, 나는 한창 백수가 된지 5개월 차가 되어가고 있었고 얼떨결에 끝나버린 연애와 도무지 끝나지 않는 시험의 행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잔뜩 날뛰고 있었다. 보통 괴로움이 가득한 날에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답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쓰더라도 일단 쓰다 보면 그 문제가 결론 부분에서 대개 풀리는 일이 많았기에 이번에도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라? 그런데 이번엔 그가 왠일로 글의 완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5개의 글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쌓였고, 가까스로 완성한 글은 고치면 고칠수록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변해갔다. 현재 겪는 불안과 괴로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어설프게 해결된 척 하고 글을 마무리하려던 것에 그가 노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그동안 소홀했던 것에 대해 약이 바짝 오른 것인가. 결국에는 노트북을 잠시 덮고 샤워를 하며 생각을 다시 가다듬을 수 밖에 없었다. 샤워기 헤드에서 물이 잔뜩 뿜어져 나오는 동안 글의 신이 말했다. "오늘은 나에 관해 써라."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른 글을 완성해야 하는데 이렇게 허락을 해 주신게 어디입니까, 하고.
앞으로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지난 몇 년동안 나는 직업이나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단 '글 쓰며 먹고 사는 사람' 이 되고 싶단 답변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소망이 상당히 많은 이들의 소망이란 것도 알고 있고, 이미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수준에 나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 작은 바람이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시도라도 해 보려고 최근 친구들과 강제적으로 매주 글 쓰는 모임에 들었다. 세 편의 글을 읽기 좋게 완성한다는 목표가 달성되면 우리 글들은 출판사에 보내지고,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않아도 독립출판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재취업을 하면 아무래도 글을 다루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를 계속 바랄 수밖에 없다.
특목고 입시에 시달리던 중3에게 급식실에서 뜬금없이 아름다운 구절들을 불어넣은 글의 신을 나는 기억한다. 뭐라도 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것 같았던 20대 초반의 나를 붙든건 분명 그였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에 그는 나에게 매일 일기를 쓰게 만들었다. 글의 신은 나에게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하려고 별다른 스펙도 없는 나를 과분한 곳에 취업시켜 3년간 단련시켰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다시는 멀어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나를 기억하라, 그리고 매일 글을 써라. 무엇이든 써라. 그러면 내가 너를 데려다 주리니, 활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나는 뒤늦게 문제가 풀렸음을 알아채는 그 아름다운 순간으로.
(이 글은 잡지 <txttxttxt> 4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