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4
뭐 그리 답답한 일이 많았는지. 생각해보면 모든 이의 인생은 답답한 일의 연속일테지만, 유독 나에게만 그게 더 가혹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조금은 그렇고. 어떻게 모든 일이 다 잘되기만 할 수 있냐? 라고 자문하며 애써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려 노력하지만, 가끔은 지금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지, 내가 하는 조금의 일도, 약간의 시도들도 전부 헛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다. 그래 글을 맨날 쓰는 건 무리지~ 하면서 <중쇄를 찍자!> 를 보는데,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일들만 가득한 드라마와 세상 씩씩하고 당찬 주인공을 보다가 문득 글을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와 나 사이에 벌어진 감정과 현실의 틈을 어떻게든 메꿔야겠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나아갈 관성을 얻기 위해 매일 글을 썼다. 미국에 있을 땐 다른 친구들 학교와 달리 교환 간 학교의 평점이 그대로 반영되는 우리학교 학사 시스템이 신경쓰여서, 그리고 도대체 잡힐 듯 안 잡히는 짝사랑의 동력을 얻으려 그렇게 매일 희망을 말하고, 기름과 햇살이 나는 텍사스 소도시의 삶에 대해,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에 대해 썼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분명 답답하거나 안 좋은 일은 있긴 했을텐데, 글을 다 쓰고 나면 위로와 함께 잘 될것 같다는 묘한 희망이 마음 속에서 피어올랐다.
6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때와 좀 다르지만 여전히 나아갈 동력과 관성을 얻기 위해 매일 무언가를 끼적인다. 이것이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분명히 하면서. 지금은 지하철 절연 구간 같은 것이다. 공급되는 동력 없이 관성으로만 육중한 객차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상황. 지하철과 내가 다른 점이라면 나는 적은 힘이나마 자가발전을 하여 관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약간의 동력을 보태는게 가능하단 것이다. 글로써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너무 비장한데, 6년 전의 나와 달리 나는 이제 어떠한 현상의 '역' 이 존재함도 믿기 시작했다. 나의 답답함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그 '역' 인 즐거움과 자유도 분명 내 안에 존재한다. 그 답답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역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만 발을 잘못 내딛으면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 같다는 두려움 앞에서, 나는 조금 뜬금없게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게 하는 건축, 행복하게 하는 철도, 행복하게 하는 예술. 뭐 이런 것들.
이 힘듬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모든 상황이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좀 더 얻게 된다면, 그 땐 두루뭉술하게만 말했던 두려움이 어떤 모습과 상황을 띄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 중 몇개는 나중에 보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웃기고 허무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도대체 행복하기만 할 땐 글을 잘 안 쓰게 될까?"
한라산을 내려올 때 친구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결국 우리는 답을 못 냈지만...
생각해보면 세계문학전집엔 거의 밝고 긍정적인 작품이 없다. 친구와 나의 일기도, 대문호의 작품들도 모두 그들 나름의 모순과 답답함을 가지고 구르다가 나온 '토로' 다. 어쨌든 답답함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쓰게 만든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답답함이 우리를 이끈다. 작가의 자리로, 결단의 자리로, 하다못해 노트북 앞자리로.
그렇게 글 한 편을 다 썼다.
정말로 답답함은 나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