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을 때

삶을 추동하는 감정 - 영화 <youth> 를 보고

by 치슬로

삶은 스스로가 이끄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삶은 때론 무언가에 의해 '이끌어질' 때가 있다.

(이 포스팅엔 영화 <YOUTH>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년 겨울, 나는 많이 아팠다.

어느 순간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강남의 어느 곳에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곳을 가기로 약속된 날엔 퇴근 시간의 콩나물 시루같은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고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찬 건대입구역의 7호선 환승 통로를 착잡한 마음으로 걸어내려갔다.

'변화' 를 꿈꾸기까지 걸렸던 세월과, 변화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환승통로는 길었다.


1시간의 이동 끝에 도착했던 그 곳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이 나를 옥죄어 오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동되는 것은 제일 먼저 정신의 무감각이고

정신이 무감각해지는 순간 제일 먼저 그 아픔을 말하는 것은 너의 이다."

뒤이어 나의 분노와 우울, 무기력 수치는 검사지에서 '최상' 수준이라고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의 실체를 눈앞에서 보는 순간,

살면서 한번도 분출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감싸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을 어찌 한 번에 털어버릴 수 있었을까,

몇 달간의 '디톡스' 기간을 거쳐서야 나는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함에 당도했다.

물론 누구나 나처럼 사람 많은 홍대 한복판에서 깩깩거리며 울분을 토해내는 디톡스를 하지는 않겠지만.


출처 : IMDB


영화 <YOUTH>의 주인공인 프레드 벨린저는 유명한 지휘자이자 작곡자이다. 그는 스위스의 한 고급 요양 시설에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그의 곡 'Simple Songs' 를 연주해달라는 영국 여왕의 요청을 들고 특사들이 그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특사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프레드 벨린저는 더 이상은 그 곡을 연주할 수 없다며 특사들을 매몰차게 쫓아낸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때 그는 이 곡은 아내인 멜라니만 부를 수 있는 곡이고, 그녀가 더 이상 이 노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연주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자신의 결정에 못을 박는다.


한편 그의 친구인 유명 영화감독 '믹' 이 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 삶의 역작을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열정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그 작업을 완성하려 한다. 삶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며 그 작업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뮤즈인 브렌다 뿐이다. 하지만 브렌다를 통해 작업의 마지막을 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할 뿐이다.

의욕 없고 아픈 프레드와 의욕이 넘치는 믹은 언젠가 '감정' 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믹은 "감정이 우리의 모든 것" 이라 말하지만 프레드는 반대로 "무감각하다." 는 말을 한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이제는 죽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바라보는 노인이어서일까? 극 중에서 정지 상태로 머무르는 노인들의 모습과 활기찬 젊은이들의 모습이 대조되며 영화는 '무감각' 의 이유는 은근슬쩍 '늙음' 이라는 답을 내놓으려 하고, 무감각의 반댓말인 '감정' 은 '젊음' 에 대응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감정이 모든 것이란 말도, 무감각하다는 말도 틀렸다.


사람의 '무감각' 이 어떻게 표출되는지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양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 상태와 겉보기에는 감정이 넘치도록 살아 움직이는 상태이다. 웃음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 이들은 어느 순간에건 무표정과 무기력을 호소하고, 감정이 생동하는(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자신이 '안전하다' 느끼는 상태에서 감정의 가면을 벗고 무기력함을 혼자 또는 소수에게만 드러내보인다.

각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의 정서, 그리고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음을 무의식은 알지만 의식으로는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무감각은 찾아온다. 무감각한 이들이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음' 을 깨달을 때 긴 시간을 지나서라도 자신을 둘러싸던 벽은 깨지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그러니 무감각하다고 말한건 사실 늙음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레드도 믹도 사실 더 이상은 '그렇게 살 수 없었던' 무감각 상태가 아니었을까?


프레드는 사실 'Simple Songs' 를 연주하고 싶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멜라니를 통해 불러지지 못할 'Simple Songs' 는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인 믹은 의욕적으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것이 프레드를 더욱 두렵게 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프레드의 꿈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불빛이 밝혀진 베니스의 광장에서 프레드는 젊고 아름다운 미스 유니버스와 급작스레 조우하고, 그때에 프레드가 보이는 반응은 '압도'와 '두려움' 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남성의 모습이 아니라 '젊음' 에 압도되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다. 미스 유니버스가 그를 스쳐가고 나자마자 사방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를 온몸으로 표출하며 그는 '멜라니' 를 수없이 부르다 꿈에서 깨어난다.

(왜 꿈의 장면이 물이 차오르는 베니스였는지는 맨 끝의 장면에서 멜라니를 만나며 시의 수미상관 기법처럼 드러난다)


억압된 상태는 일종의 기만이다.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이들은 사실 자신을 더이상 구원할 수 없는 과거의 것들에 집착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들에게는 압도당할 뿐이다.


한편 믹은 이제 브렌다의 영화 출연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먼 길을 날아 그의 뮤즈, 브렌다가 도착했을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하지만 브렌다는 '멕시코의 TV 시리즈에 출연하기로 했다' 며 기대와는 다른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결국 브렌다는 믹이 더이상 대단한 감독이 아니고 힘빠진 작품만을 내놓는 '퇴물 감독' 임을 신랄하게 드러낸다. 믹은 자신이 길거리에서 발굴해서 스타를 만들어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항변하지만 브렌다는 끄떡없다. "이제는 그만해야 할 때" 라고 브렌다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다.


출처 : IMDB


사실 믹도 자신의 모자람을, 자신이 어쩌면 그만해야 할 때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도 애정을 담아 키우고 몇십년간 자신의 근간을 이뤄온 존재인 브렌다가 그 불완전함을 지적했을 때, 믹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믹은 스위스의 너른 풀밭 위에서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들의 환상을 본다. 순박한 눈빛을 한 여인, 침실로 유혹하는 여인, 자신이 창조해낸 수많은 캐릭터의 군상을 만나며 그는 다시 한번 그들을 발굴한 자신의 존재에 전율하고, 마치 십자가 위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제는 "다 이루었다" 며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무리짓는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난 프레드는 멜라니가 아닌 다른 소프라노(조수미)를 통해 'Simple Songs'를 연주한다. 관객들이 이미 죽은 줄만 알았던 (사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멜라니를 10여년 만에 찾아간다. 그가 그녀 없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이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연거푸 확인하고서야 한 일이었다. 결국은 그의 완벽한 기준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연주였지만, 그는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였고 영화는 그 곳에서 끝난다.



불완전함을 맞닥뜨렸을 때


누군가는 정말 믹의 행동을 '다 이룬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 하겠으나, '생의 지속' 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믹을 지지할 수만은 없었다.


언젠가 현실의 불완전함과 맞닥뜨려야 할 때 나의 존재는 철저히 깨진다.

어쩌면 그것을 '죽음'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옛 존재에 죽음을 고할 때, 나는 철저히 죽는 길을 택하고 다시 삶을 볼 것인가.

아니면 죽기를 거부하고 '완전하다' 일컬어지는 옛 존재를 붙들 것인가.

믹은 자신이 창조해낸 옛 세계 속에서 완전하기를 택했고, 프레드는 불완전하지만 멜라니가 더 이상은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을 '들이받는' 일을 택했다.


뭐가 되었건간에 삶을 추동하는 감정은(실제로 죽기를 자청한 것도 삶의 일부라고 가정한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달아버린 인간의 나약한 마음 아닐까.

한계를 부정함으로써 (혹은 옛 자신의 죽음) 현세의 불완전한 삶을 이어가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한계를 인정하고(옛 자신이 죽어야만 함) 현세의 불완전한 삶이나마 이어갈 것인가.


사실 위에서 말했던 그 감정 '디톡스' 란 일은 사실 나의 지난날 울분만을 토해내는 일로 끝나지는 않았다.
나의 불완전함으로 누군가에게 준 상처와 아픔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는 일을 모두 치루고 나서야 일단락이 되었다.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불완전함을 직면하는 시간을 가지는 일은 사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 과정을 무사하게 지나갈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나는 아직도 그 불완전함과 싸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이려니...


나뿐만 아니라 극 중 인물들도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면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일들을 반복하며 삶이라는 것을 살아내간다. 프레드의 딸도, 할리우드 배우도, 사랑받지 못하는 불완전한 모습을 받아들이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젊음과 늙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물리적인 죽음 이전에 불완전한 내 자신이 깨지는 마음의 죽음을 인정하는 능력이 아니었을지.

독일 라이프치히의 공동묘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Zum Tode geführt und siehe wir Leben." (죽음으로 이끌어져서, 우리는 삶을 본다. )


오늘도 불완전한 자신이 찔러대는 칼에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하며 삶은 계속된다.

젊음은 불완전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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