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1000일

천일간의 글쓰기 여행을 시작하다.

by 바이올렛


2019년부터 2022년까지, 2년 9개월, 1000일간 블로그에 매일 글을 썼었다. '전심전력'이라는 말은 여기에 쓰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만큼 혼신의 힘을 쏟아 쓸거리를 찾았고, 블로그 인맥을 대함에 있어서도 진심이었으며, 무엇보다 '글쓰기' 자체에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블로그에 시시콜콜한 잡담을 쓰다보니 일반인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천 일은 인생에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걸 알아챘다.


최근에 사직서를 썼다가, 철회를 하며, 나는 우스운 사람이 되었다. 그 우스운 사람 앞에는 최소한 몇 년은 군말없이 회사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따라붙었다. 심심찮게 사직서를 냈다 번복하기를 반복할 수는 없기에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생존' 차원의 직장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일부러 헐렁하게, 나사 빠진 사람처럼 살고 있다. 헐거워야 마음이 편안하다. 딱딱 맞게,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끝까지 숨기려고 하다가 더 큰 화를 부른다는걸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대충대충 느릿느릿하게 설렁설렁 살려고 한다.


그래도 어쨌든 1차 목표지점은 존재한다. 명예퇴직이 가능한 그날까지는 직장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시스템을 만드는 중이다. 명예롭게 퇴직할 그날까지는 3년하고도 10개월이 남았다. 그것을 주로 환산했더니, 꼭 200주가 된다. 다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을 곱해주면, 희한하게 내 앞엔 작정하고 만들기도 어려울 1000일이 주어진다. 희한한 노릇이다.


휴직기간에는 주말까지 포함해서 2년 9개월이면 1000일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복직 후 현직에 있을 때에는 주말을 제외하고 까만날만 세어서 3년 10개월동안 1000일간의 글쓰기 여행을 떠날 참이다. 2019년에 휴직을 했을 땐 그저 '인생이 괴롭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것에서 시작했었다. 곪을대로 곪은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나를 옥죄어왔었다. 도망치듯 자기계발의 세계로 빠져들었었다. 마치 종교처럼 자기계발서에 심취해서 종교인의 행동강령을 따르듯 새벽기상부터 독서와 글쓰기까지 강박적으로 해내었다.


당시의 글쓰기에 방향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괴로운 마음 달래기용, 뽐내고 싶은 마음 어루만지기용, 나도 모르는 내 마음 휘갈겨 발산하기용 같은 지극히 쓸모없는 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징징거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싶어지는 날도 있었고, '남 부끄러운줄 모르고 별 얘기를 다 하는구나.' 싶은 날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써재낀 글이 모여서 초보작가의 첫 번째, 두 번째 책이 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책(치매 간병 에세이)을 출간하면서는 내적 갈등이 생겼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공공연히 출판물로 만들어내어서 과연 내 삶은 제대로 유지가 될까 싶어졌다. 어떤 이야기가 세상에 유익할지라도 그 글을 쓴 작가와 작가 주변의 가족에게 가슴 아픈 영향을 끼친다면 과연 그 출간이 유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답을 모르기에 나는 조금더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에세이를 정말로 소설로 쓰고 싶었다. 마치 내 이야기가 아닌냥 홀가분하고 가볍게, 내 인생의 시궁창같은 부분이라고 밝히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소설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성격의 글이 아니었다. 내 인생엔 아직도 풀어놓지 못한 아픔이 몇 덩어리 더 있다. 그걸 다 글로 풀지 않고는 이번 생에 눈을 감아도 편치 않을 것 같다. 나는 간절히 쓰고 싶다. 쓰면서 내 안의 나를 수백번, 수천번 만나고 화해하고 어루만지고 싶다.


이번에 퇴사 결심을 하고나서 바로 이어서 한 행동은 '소설 쓰기 아카데미'에 등록한 일이었다. 하지만 퇴사 의사를 철회하기로 결심하고는 역시 가장 먼저 그 교육과정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나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테니. 그렇게 소설 쓰는 일은 내게서 멀어지는가 했지만, 내 운명의 스피커는 계속 글을 써야 한다고, 잘 쓰고 못 쓰고는 둘째 치고 우선은 글쓰기의 절대량을 꽉꽉 채우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소설 읽기에 별 관심이 없다. 20대까지는 말랑말랑한 연애소설도 읽었고 판타지 소설도 좋아했지만, 이제는 실용서를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영혼을 쓰다듬어주는 문학작품은 간지러운 호사처럼 느끼며 근 10년을 살았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소설가가 되는 방법에 대해선 다양하게 검색하며 산다. 유명한 소설가들이 직업인에서 어떻게 전업작가로 전환하게 되었는지 인터뷰와 칼럼을 통해 취재하듯 조사를 한다.


그리고 한 유명 작가의 인터뷰에서 <소설쓰기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소설가가 되는데 꽤 주효했다는 부분을 발견하곤 오늘부터 1000일간의 글쓰기 여행의 시작답게 필사하며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소설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작법서를 먼저 읽고, 그 다음은 유명한 소설을 읽고, 점차 좋아하는 소설가를 발견해서 푹 빠져보는 쪽으로 전략을 짰다. 문제는 시간과 체력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혼자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을 활용하거나,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집중해서 글을 쓰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그리고 좋은 글을 오랫동안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운동을 더 꾸준히 즐겁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가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희망적인 부분이다.)


한때 책을 엄청나게 구입했었다. 대형책장을 사고 거기에 수백권의 책을 빽빽하게 꽂으며 마치 구입한 권수가 곧 나의 지식량이라도 된다는듯 책 앞에서 쇼를 하듯 강의도 하고, 영상도 촬영했었다. 하지만 이젠 책구입에 신중하려고 한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어보고 소장가치가 있는 것만 구입하려고 한다. 북커버를 구입했다. 이제 나에게 독서는 처절한 싸움이며, 새로운 인생으로 가는 진지한 탈출구가 될 것이다.


나는 1000일이 어느 정도 길이인지 한 번 경험한 바 있다. 그 시간동안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수행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쓰고 싶고, 써야만 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하염없이 사람들사이에서 휩쓸리듯 인생을 살아왔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어색한 미소를 띄며 남들이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자신감이 없고, 자꾸만 숨고 싶었다.


혼자가 편한 나의 성향과 자꾸만 터져나오는 이런저런 상상의 조각들이 불편했다.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고 조직생활, 사회생활을 천연덕스럽게 잘해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과 그런 삶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와 세계를 접하고나선 내가 새로운 세계에선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듯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는걸 발견했다. 그 기쁨과 행복은 온몸을 감쌌고, 기꺼이 두 번째 1000일을 나름대로 성실하고 꾸준하게 이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설 쓰고 자빠졌네.'


보통은 어이없는 말을 비아냥거리는 투로 소설 쓰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나는 이제 물러날 곳이 없다. 회사에선 사직서를 냈다가 취소한 사람으로써 한동안 소소하고 잔잔하게 퍼지는 소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고, 가정에선 아이둘과 남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림과 육아, 내조에도 열을 올려야 할 것이다. 이제 마흔이 된 나의 영혼에는 아직도 어릴때에 미쳐 해결하고 오지 못한 감정의 묵은때도 벗겨주어야 하고, 사그라들어버린 혹은 말라비틀어진 나의 꿈동산에도 조리개 가득 맑은 물을 넣어 싱그러운 물줄기를 뿜어주어야 할 것이다.


소설 쓰고 자빠지고 싶다. 현실에선 어쩌면 찾기 힘들 보람, 감동, 행복, 감탄, 찬란함을 글을 쓰며 느껴보고 싶고, 또 혼자만 읽을 글이 아니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도 무사히 도착하는 글을 쓰고 싶다. 원없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쩌면 도리어 힘들지도 모른다. 하루에 얼마 주어지지 않는 자유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안경을 깨끗하게 닦아끼고, 아이들이 잠들기전 마지막으로 깔깔거리며 하루를 주워담는 소리를 들으며, 내게 깊숙히 빠져들고 싶다. 마음속 깊은 곳에 품은 나의 희망도 회한도, 한때 분실되었던 사랑도 감사도 모두 되찾아 더 키우고 싶다. 그렇게 1일차의 밤이 흘러가는 중이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잦아들었다. 이제 나도 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