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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Apr 14. 2023

민원의 세계가 열리다.

새해에 서비스부서로 이동되어 왔다. 서비스 마인드 교육 같은 것을 별도로 받지는 않았고 전임자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받은 것이 전부다. 출근과 동시에 전화 민원에 응대해야 했고, 부서로 직접 찾아오는 민원인을 맞이해야 했다. 간단하게 끝나는 업무가 많았지만 첨예하게 갈리는 부서간의 입장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때도 종종 생겼다. 동네북과 다를바 없는 부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어떤 때 치가 떨리곤 했다. 혼자 부들부들 떨다가 같은 팀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허탈하게 웃곤 했다. 민원 부서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전화로 울분을 토해내고 짜증과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곤 했다. 다행히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고객응대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우리 회사에도 전화 녹음 서비스와 안내멘트가 나가는 기능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바로 신청했다. 녹음된다는 메시지가 나가자 사람들은 온순하게 소속과 이름을 먼저 밝히고 궁금증을 물어왔다. 그래도 간혹 고삐 풀린듯 화를 내는 사람들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맞아야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근무 시간의 시작과 동시에 전화가 울렸다. 받았더니 대뜸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이미 어제부터 여러 부서에 전화를 돌리며 담당자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전부 빙빙 돌리기만 할 뿐 누구하나 나서서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다며 전화를 받은 나에게 화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것처럼 처음엔 공감과 경청의 자세로 듣기 시작했다. 가끔 호응하고 맞장구도 치다가보니 차츰 나에게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하고 분노 지수를 높이고 있었다. 우선 전후사정을 파악해야했기에 관련 내용을 메모하고 다시 전화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다양한 기능이 있는 전화여서 통화 시간을 확인해보니 7분이 넘었고, 전화 건 사람의 소속회사도 자동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7분간 화난 사람의 목소리를 귓가에 대고 있었더니 몸이 벌벌 떨렸다. 뇌도 정지한 느낌이었다. 일을 현명하고 차근하게 풀어내고 싶었지만 우선 내가 살고 봐야했다.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며 어느 부서의 누구에게 내용 파악을 하고 협조를 요청해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대책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튼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이 꼬였다. 함께 근무하는 직원에게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무조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심장은 쿵쾅쿵쾅, 다리는 후들후들했다.


내가 그 민원인이 겪은 일에 대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욕받이가 되고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잘난척 하며 산 적은 많지만, 일부러 ‘못난척’하며 산 적은 없었는데 이 부서에 오고보니 저절로 낮은 자세로 몸이 구부러지고 ‘못난 이, 화풀이 대상’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심히 울적한 기분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았지만 맹목적으로 화내는 사람에게 심리적 충돌을 당하고 나면 나를 지키는 일이, 감정의 폭풍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일이 생각보다 중요하고 가장 우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마음을 추스르고 사무실에 돌아왔지만 하루 종일 멍했다. 얼굴을 모르는 전화 상대방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얼굴도 못 본 사람에게 그렇게 화를 쏟아내는 일,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걸까 생각하게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씩 일을 풀어나갔다. 몇 군데 부서에 전화를 했고 다행히 협조를 받아 일을 해결했다. 민원인에게 전화를 해서 종결된 사항을 이야기했더니 그것 보라면서,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을 이제 했다면서 반말 비슷한 무례한 말을 찍찍 뱉어댔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일이 해결되어 다행이다.’라고 연신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굽어보는 자아는 남몰래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 남을 위로하다가 정작 내 마음이 속에서 발발 떨고 있었다는 걸 이 밤에, 이런 글을 쓰며 알아챈다. 아마도 처음 이 부서에 온 이후로 두 달은 핑크빛에 물들어 좋은 점만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나는 수많은 민원인들의 전화와 방문, 인터넷 업무 속에서 때로는 길을 잃고 ‘나’라는 배가 풍랑을 만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업무에 떠밀려 중심을 잃기도 하고 말이다.


친절한 것이 좋은 것이고, 나긋나긋한 서비스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는 이제 지워야겠다. 나는 ‘고객응대근로자’이니 산업안전보건법도 다시 보고 폭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끊고 단호하게 대하며 나를 지키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




내게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있었던가. 이번 주말은 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간이다. 월요일에 중요한 일이 있다. 주말엔 그것에만 집중하며 차근히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회사 일도 하고, 아이 둘도 돌보고, 남편도 돌보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도 돌보고, 살림살이도 살피고, 그와중에 나의 꿈까지 키우려면, 정말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형국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사는 중이다. 가끔은 뭐하러 이렇게 허둥대며 굳이 엄마의 꿈을 내 삶의 한가운데에 끼워넣으려고 애쓰나 싶어진다. 꿈 그까짓것 안가지면 그만일텐데.


하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이 현실을 이겨내기 힘들 것 같다. 다행히 밥을 벌어먹고 살고, 아이 둘을 너끈히 키워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꾸만 샘솟는 희망과 용기를 가진 것이 내게 벅차다면 벅찬 현실이지만 이번 주말엔 나의 그런 성질을 잘 이용해봐야겠다. 오늘밤에 부디 숙면을 취하고 낮에 있었던 일은 씻은듯 지워버리고 - 다행히 글로 쓴 것은 내게 더이상 남아서 곪지 않는다. - 내일은 눈 뜨자마자 노트북과 함께 집을 나서야겠다.


엄마의 꿈을 응원하는 남매 덕분에 나는 또 꿈과 한 걸음 가까워진다. 인생의 순간 순간이 꿈과 아주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기쁨, 그 희열을 가슴에서 놓지 않으며 조금 더 씩씩하게 이 길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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