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계획표를 만들고, 줄 긋고, 들여다보고 사는 줄 알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 아니! 왜 그러고 살아요? 라는 질문이 대번에 돌아올 것이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혼자 웃고 있다. 그래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 심정으로 나의 철두철미함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선 무어라도 종이 위에 적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흩어지는 생각은 카톡 내게 보내기 기능으로 오타가 나더라도 재빠르게 보내고, 나머지 메모는 모두 볼펜으로 적는다. 내가 하루에 몇 개의 메모를 하면서 살지? 한 번 세어보자.
책상 위에 항상 있는 100일 계획표, 유난히 바쁜 11월을 잘 보내기 위해 특별히 만든 월간 계획표, 매일 출근하자마자 적는(혹은 전날 미리 적어두는) 하루 계획표, 1년 업무를 주간 단위로 적고 있는 업무 수첩, 장보기용 비정기 메모, 손바닥 사이즈의 개인 다이어리(주간 단위), 그 외에도 아이 교육 프로그램 일정표와 내 교육 프로그램 일정표까지 가지고 있다. 내가 만든 것만 6개, 교육기관에서 만들어서 배부해준 것이 2개, 총 8개의 시간관리표를 가지고 동그라미를 치고 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해가면서 씩씩하고 굳세게 살아간다. 장하고 가상하다.
직장인에게 필요한 메모는 업무 수첩과 하루 계획표 두 개 뿐이고, 나의 꿈과 성장을 위한 것은 100일 계획표, 월간 계획표, 개인 다이어리, 교육 프로그램까지 네 개이다. 그래, 내 정체성은 꿈이 있는 엄마였지. 다시금 되새겨본다. 올해 상반기에는 소설 쓰는 법을 배워보겠다고 주말마다 열차를 타고 다녔고, 하반기에는 동화를 써보겠다고 엄청나게 책을 읽고 있다. 기초가 없고 기력이 없고 기운이 없는 작가지망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 뿐, 수첩에 읽은 책의 제목을 나열하고 감상을 적어내려간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데, 정말로 인생이 술술 풀리는 길이 있나 싶어 진지하게 파고드는 중이다.
어떻게 매사에 계획표를 짜고 계획을 지키고 그 틀 안에서만 살 수 있겠나? 회사에서 여러 부류의 인간상을 만나며 거기에 내 모습이 투영되는 것을 봐가며 업무도 쳐내고 시간도 쳐내며 강철 멘탈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젠 질질 짜면서 퇴사를 고민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을 정해두고 그냥 조용하게 회사에서 성장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하려고 마음 먹었고, 그 외의 시간에는 철저하게 홀로서기를 준비 중이다. 흔들릴 시간도 고민할 여유도 없다. 이젠 그냥 직진이다.
요즘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직장 동료들이 나중에 퇴사 후 내가 작가로 활동하며 인터뷰 같은 것을 할 때 얼마나 놀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혼자 피식 웃은 적이 있다. 그 가정이 지금의 이 팍팍한 삶을 윤기나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 계속 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책을 읽는 시간이 퍽 행복하고 진지하다는 것이며, 그 일에 평생을 바치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 벌써부터 얼굴 팔릴 일부터 생각하는 것이 참 가볍고 천박한 욕심일지라도, 어쩌면 그보다 더 속물적인 접근일지라도 내겐 지금을 버틸 상상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버텨낼, 회사 스위치를 끄고 작가 스위치를 켤 수 있게끔 하는 나만의 비밀스런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이 회색빛 하루를 버티겠는가?
다행히 내 머리칼에는 흰 머리가 늘어가고 있고, 화장은 한 지 오래되었고, 회사에선 나의 외모만 보고도 공손히 대하는 젊은 직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더이상 잡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은 있으나,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듯한 감정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어서 모호하고 편안한 이중적인 면이 있다. 그렇게 나는 점차 고연차 직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개인의 삶을 더 풍성하고, 풍부하게 하고 싶어서 자꾸 그 세계를 넓혀가는 중이다. 관련 정보를 찾고 글을 읽고, 내 글을 쓰고 합평을 받고 얼굴이 붉어져보기도 하고, 다시 숙제를 받으면 맘을 배배 꼬면서 잔머리를 굴려보기도 한다. 이렇게 근황에 대해 몇 글자 적을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자꾸 떠오르는 몇 사람, 당장 만나자고 약속 잡고 싶은 사람도 몇몇 떠올랐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내게 집중할 시간이라고 여겼다.
회사에서 겸업 허가가 났지만 당분간 강의를 할 마음은 없다.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포기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때이다. 이렇게 자기 꿈을 감당하느라 벅찬 엄마를 둔 아이 둘은 매일같이 쑥쑥 자란다. 친구들과의 관계, 학교에서 자신의 입지, 좋아하는 책과 취미활동을 넓혀가고 있다. 신기하고 고맙다.
엄마는 꿈이 있어서 그 여정을 이렇게 계속 기록 중이다. 나의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 어딘가를 바라보고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기에 이 발자국을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내일은 자고 일어나서 북유럽 신화에 대해 공부할 차례다. 책을 읽고 마음에 징소리가 나는 걸 느끼고, 다시 내 언어로 써내는 것을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써야만 사는 사람, 쓰고 싶은 사람, 쓰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 사람의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간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