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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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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inssoon Jan 09. 2022

다시 제로 베이스로!

추락이 아닌 또 하나의 시작.

 나는 팀장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수석' 타이틀도 달았다. (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사주에 '관官'자가 들어 있는 탓인지 어릴 때부터 '자리'를 좋아했다. 반장은 당연, 학생회장도 하고 싶고, 몇 명 뽑지 않는 방송반에도 들어가고 싶고... 그런데 첫 직장이었던 잡지사에 들어가 보니 보통의 회사에 존재하는 대리, 과장, 부장 등의 직급이 없었다. 대략 10년 차까지는 모두 '선배', '후배'로 통했고, 입사 후 10년쯤이 지나야 한 팀을 이끄는 팀장 혹은 수석 에디터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이직과 조기 퇴직이 잦은 잡지 판에서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즐김 반, 버팀 반으로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팀장이 되었다. '팀장', '수석 에디터'라는 글자가 콕콕 박힌 명함을 새로 받은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매달 잡지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녁도, 주말도, 명절도 기꺼이 반납하던 시절, 한 달에 1권씩 1년 이면 12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것이 쌓여 100여 권이 넘어갈 무렵에 처음으로 신분 상승(?)을 한 셈이다. 많지는 않지만 연봉도 올랐고, 모두가 나를 '팀장님'이라 불렀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뭐라고' 소리가 0.1초 만에 나오지만 사회적 성취가 삶의 전부였던 그때의 내겐 그게 '뭐'였다.  


 같은 일을 10년 가까이하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보이는 것이 있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빠르게 판단하고, 어려운 작업에 도움을 줄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수년간 업계 사람들과 소통하며 쌓은 인맥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내가 일할 때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다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유능감으로 나의 팀장 시절은 꽤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그 시절의 나를 한 컷으로 그린다면 120여 권의 잡지로 쌓아 올린 고층 빌딩 꼭대기층에서 밤낮없이 잘난척하며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랄까. (평소 고층 오피스에 로망이 있었다.)   


 아마 그 이후로 계속 일을 했다면 지금쯤은 잡지 200여 권을 깔고 앉은 편집장이 되었으려나. 아니면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떠밀려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나는 팀장도 수석도 아닌 5년 차 엄마다. 그리고 내가 일련의 사회적 유능감에 꽤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임을 깨달은 건, 의외로 그 모든 걸 내려놓고 엄마가 된 후였다. 엄마가 된다는 건, 유능감으로만 본다면 120층 오피스에서 1층 로비로 수직 하락하는 기분, 말 그대로 제로 베이스로 돌아가는 일이었으니까.


 1.7, 1.8kg으로 태어나 한 달간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간신히 2킬로그램을 넘긴 이른둥이 둘을 데리고 집에 왔을 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속싸개는 어떻게 하는 거지? 수유는 어떻게? 트림은 어떻게? 왜 우는 거지? 왜 안 그치는 거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후배들에게 폭풍 잔소리를 해대던 팀장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게 새롭고, 두렵고, 실수하면 어쩌나, 내가 지금 하는 게 맞는 건가?... 처음 맞닥뜨린 인생 최대 혼란 속에 안절부절못하는 완전 초짜 신입일 뿐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신입이 된다는 건 실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나의 무능함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사회인으로서의 삶만큼 가정에서의 삶도 소중하다고, 엄마는 가족이라는 팀을 이끌어가는 팀장이라고, 혹은 엄마인 것만도 너무 대단하고 멋진 일이라고, 그래서 사회에서 내려놓은 일에 대한 아쉬움을 채우고도 넘친다고.... 누군가는 그렇게 위로했지만 당시 내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말로 위로하기엔 현실이 너무 혹독했으니까. '육아 잡지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게 얼만데...' 주변 지인들은 물론 나 스스로도 내심 잘할 거라 기대했던 '엄마'라는 새 커리어를 시작하며 내가 제일 먼저 깨달은 건 기존에 안다고 생각했던 게 정말 아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제로 베이스'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제로 베이스가 처음의 충격과 달리 추락이나 후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나 역시 30대 후반까지 같은 일을 하면서 낯설고 불편한 새 것보다 익숙하고 안정된 일상이 더 좋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제로 베이스에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새로운 일이 주는 설렘과 기대, 흥분, 그리고 무엇보다 배움을 내가 참 오래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심지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라서 헤매고 좌절했던 신입 시절엔 몇 날 며칠 맨땅에 헤딩하다 찾아낸 정보 한 줄이 그렇게 반갑고 귀했다.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고 돌려 결국 원하던 취재원을 찾아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내일은 또 무슨 낯선 미션이 기다리고 있을까?' 매일 불안 한가닥을 마음에 품고 잠들지만 다음 날은 그런대로 또 잘 버텨내고, 운이 좋은 날엔 칭찬도 듣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보냈던 신입 시절. 처음 내 이름이 인쇄된 기사를 받아 들고 느꼈던 뭉클한 희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No'라는 답이 먼저 나오겠지만, 어쩌다 다시 시작된 나의 두 번째 제로 베이스는 치열했지만 행복했고, 너무나 고단했지만 내내 웃음이 나던 내 첫 번째 제로 베이스의 기억까지 함께 소환해주었다.


 마흔이 다 되도록 밥 한 끼 제대로 못 차리는 요리 실력으로 매일 밤마다 갖가지 식재료를 다지고 냄비를 저어가며 이유식을 만들고, 기사는 반나절 혹은 하루 취재로 써내면서 젖병 하나 세제 하나 사는데 6박 7일 넘게 취재를 하고, 사람 하나 그리라면 동그라미에 선으로 팔다리 찍찍 그어놓고 펜을 던져버리는 똥손이지만 자동차, 기차, 곰돌이는 남몰래 연습해서 원래 잘 그리는 척 그려낸다. 잘 때 깨우면 세상 제일 포악한 얼굴로 변하는 잠꾸러기지만 누워서 30분을 채 못 자는 아이를 밤새 안아 재웠고, 5년째 수면 독립 따위 꿈도 못 꾸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다가 이따금 얼굴에 닿는(사실은 차이는) 작은 발의 감촉에 스멀스멀 웃음이 나기도 한다. 다시 제로 베이스로 돌아간다는 건,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내고, 영원히 몰랐을 내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다.

  

 더불어 아마도 평생 몰랐을 새로운 인간관계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다. 나는 꽤나 못생긴 팔꿈치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평생 만난 사람들 중에서 나보다 쭈글쭈글하고 못생긴 팔꿈치를 가진 이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30대 초반에 만난 한 소개팅남은 자기 할머니 팔꿈치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런데 엄마가 된 후 이 못생긴 팔꿈치는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하고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가 내 품에서 내려와 누워 자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는 내 팔, 정확히는 팔꿈치를 만져야만 잠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엄마 팔이 좋아.", "여기(팔꿈치)가 좋아."라며 내 콤플렉스를 자신의 최애 수면 동지(?)이자 힐링 포인트로 꼽았다(이것이 내 수면의 질에 미치는 영향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미술 시간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내 모자란 그림 실력도 아이들 앞에선 다른 차원이 된다. 아이들은 내가 동그라미에 막대만 쭉쭉 연결해 그려준 사람 하나만으로 상상초월 이야기를 펼쳐내고, 네모에 동그라미 두 개 대충 그려놓고 자동차라고 우기는 엄마에게 '우와 멋지다!'를 연발하며 감탄한다. 내가 뭘 했다고! 이건 그 옛날 나의 사수들이 숱한 채찍질 끝에 던져 주던 말라비틀어진 당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콤한 칭찬이다. 세상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무조건적인 칭찬과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떤 인간관계에서 내가 이렇게 절대적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경험을 나눌 수 있을까.


 엄마 경력 5년 차, 사회생활 5년 차 때와 비교한다면 그 정도는 유능해졌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엄마는 비슷한 업무를 반복해서 유능성이 높아지는 직군도 아니고, 경력이 쌓인다고 더 잘하는 일도 아니다. 한 해 한 해 아이의 성장에 따라 업무는 긴밀하게 변경되고 그에 따른 역할도 달라진다. 모든 아이가 (심지어 쌍둥이도) 다르기 때문에 정답 같은 가이드라인도 없고 아무리 유능하다는 선배맘이나 전문가의 조언도 내 아이에게 통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고작 5년 만에 ‘좀 할 만한 일’이라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엄마가 되고 나서 난 내가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나 빼고 주변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일 수 있다.) 체력이 이렇게 약한 것도, 화를 이렇게 쉽게 낼 수 있다는 것도 이전엔 몰랐다.(그리고 이 둘의 엄청난 상관 관계도.) 생각보다 빈틈이 많고 부족한 모습도 매일 새로 발견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나 실망감이 드는 대신,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는 사실이다. 이건 스스로 느끼는 팀장 시절의 나와 가장 다른 점이다. 후배들의 사소한 실수도 사사건건 지적해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를 입에 달고 지내고, 계획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요즘은 "상황 봐서~"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선 "도대체 왜 그래?"라고 끝까지 따져 묻던 내가 지금은 "너는 그렇구나."라고 말한다.


 마흔의 문턱에서 다시 제로 베이스에 섰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일에 빨리 유능해져서 다시 높은 층에 오를까?'를 먼저 생각했다. 5년 정도 지나면 그래도 중간 정도는 왔다고, 좀 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지금의 난 여전히 베이스에 머물고 있다.(다만 더 이상 '제로'는 아닌 채로.) 엄마라는 일은 빨리 높게 올라가는 것보다, 단단하고 넓게 그리고 깊이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부실한 바닥에 푹푹 빠지고 돌부리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부족한 인내심, 약한 체력, 까다로운 성격, 어린 시절의 기억... 모든 것이 다 구멍이고 돌부리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딛고 선 베이스를 더 고르고 단단하게 다지기로 했다. 때때로 주변엔 뭐가 있나 돌아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고층 오피스에 대한 로망은 없다. 더 이상 팀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니어서 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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