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였음을
'책육아'시작하여 '나'를 '재양육'하기 까지
나의 성장기를 돌이켜보면 나는 문제아도, 그렇다고 아버지가 알콜에 쩔어있는, 그리고 습관처럼 엄마를 때리는 폭적력인 남편도 아니였다. 엄마는 우리를 사랑했고, 희생적인 듯 보였고, 거의 매일 일을 끝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어왔다. 외롭다는 감정보다는 항상 엄마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빨리 엄마가 왔으면 했고, 밤 10시가 되면 더 미치게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흔한 일상이였기에 그것이 나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를 않았다. 그저 나를 엄마의 힘듬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없는 딸쯤으로 생각했을 뿐.
이상할 것 없이 평범한 성장환경. 모나지 않고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성장배경. 그러나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내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특별하지 않았기에, 모나지 않았기에, 평범하다고 믿었기에 나는 아프면서도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부부였지만 부부가 아니였던, 늘 싸운 것은 아니였지만 일상의 비난 속에 노출 되어 있었던 나는, 내 것이 아니였음에도 모두 내 수치심처럼 흡수해버렸다. 내 것이 아니였기에 털어내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이상하다고 믿는 것 뿐이였다.
입무거운 아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은 가족안에서 아빠가 자신의 감정을 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퇴근후에 마시는 술이였다. 그 모습이 참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겉으로는 참 순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화가 나면 눈빛이 변했다. 어릴 적, 엄마 없는 집에서 보는 그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도망가고 싶었는데 '집'이라는 감옥, '전화'라는 생명줄 말고는 내가 도망 칠 곳이 없었다. 그저 엄마가 빨리 오기만을 웅크려진 마음을 부여잡고 기다렸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빠의 그 눈빛, 그 눈빛은 때때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마무리 되곤 했다.
4살, 5살. 한참 떼부리고 뒤집어질 나이에 할머니 병간호 때문에 여동생과 외할머니 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사이 나빴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사이에서 마음을 졸였던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더 커서는 어린 남동생만 데리고 외할머니 병간호를 갔던 엄마를 기다리며 이모집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모네와 가까이 살아서 좋았지만, 그랬기에 비교에서 늪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난다. 어린 자식보다는 자식의 도리가 더 중요했던 엄마였을 것이다. 지금이야 어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4살무렵 엄마와 6개월 가량 연락도 못하고 지냈을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치유의 과정이 거듭될 수록 그 시간이 내게는 참 아픈 시간이였음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별거없는 평범한 집안의 첫째딸. 남들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지만 우리를 위해 애쓰는 엄마가 있기에 나는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답답하고, 때론 혼란스러운 일이 내 온 몸과 사고를 굳어버리게 만들지라도, 집을 떠날 수 없으면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무기력, 그리고 이유도 모르게 터지는 울분은 돌이켜 보면 다 이유가 있었지만, 나조차도 그것을 알아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줄 어른을 단 한명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 나는 나를 조금은 덜 비난하고 살 수 있었을까. 그 시절 외로운 내게 느껴져 글을 쓰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 질 것 같다.
특별하지 않아서 아프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특별하지 않다는 핑계는 외면하고 싶은 상처가 있음의 반증일 뿐, 상처는 특별할 것도 평범할 것도 없었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던 두려움, 수치심, 슬픔만 있었을 뿐이다.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상처라 더 아프고 외로웠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였음을.
나는 무서웠고, 보호가 간절히 필요했고, 나보다 나를 더 믿어줄 어른이 필요한 아이였을 뿐이였다. 나만 그랬을까? 그렇게 우리 안에는 다 크지 못한채 여전히 힘겨운채 살아가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존재한다. 아팠는지도 모르고 몸만 커버린, 부모조차 믿어주지 못해 나조차 외면해버린 '상처받은 내면아이'. 그 내면아이가 여전히 치유받지 못한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면 아마도 때때로 나는 많이 아플 것이다.
'책육아'로 '육아'에 눈을 떴지만, 결국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만나며 육아할 수 밖에 없었던... 그 과정을 글로 풀어 보려고 한다.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였음을. 남들에게 평범한 것이 나에게는 유별난 것일 수 있음을. 반대로 내가 평범하다 믿고 싶었지만, 그것이 내게 낙인이 될까 두려워 평생 외면하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육아의 시간은 외롭고 더딘 시간들이였지만, 아이와 함께 나를 '재양육'하는 시간이였다. 동시에, 고통스럽지만 '나'와 '아이', 그리고 나의 '부모'들을 이해하기 위해 걸어왔던 의미있는 여정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