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두려운 오직 착하고만 싶은 내면아이
아이와 지내다 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지점이 있다. "윤찬아 양치하자" , "싫은데" "그래도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다. "윤찬아 동영상 이제 그만 보면 어떨까?" "싫어" "엄마는 그만 봤으면 좋겠는데" 화가 나지만 나는 더이상뒷말을 잇지 못한다. 분명 화가 나고 끓어오르는데, 아이에게 막상 내 맘을 표현 할 수가 없다. 왜? 왜 그럴까? 나는 좋은 엄마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통제하지 않는 좋은엄마. 아이의 모든 욕구를 존중해주는 좋은엄마. 아이 잘 키우는 엄마는 이렇게 해야 할 것만 같고, 이렇게 하는게 배려깊은 사랑을 주는 엄마인것만 같다. 내 맘안에가득차 있는 분노는 외면한채, 내 맘안에 가득한 통제의 마음은 외면한채, NO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이의 욕구를 꺾는것 같아 그저 죄스러워서 나의 욕구를 죽일 지언정 아이에게 NO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요즘 나는 내가 아이들의 '싫어', '안해'라는 소리에 굉장한 공포를 가지고 있구나를 느낀다. 단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아이들의 말일 뿐인데, 나는 그 말이 꼭 나를 시험에 빠트리는 말 같다. 안들어주면 안될 것 같고, 안들어 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나쁜 엄마가 안될까, 어떻게 해야지 좋은 엄마가 될까. 그 순간에 나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내 맘과 상관없이아이의 욕구를 허용해버린다. 그리고 나서는결국 분노로 아이를 잡는다. '그만 좀 하지' '그만 좀 보지' '내 말좀 들어주지' '지멋대로만 하는 나쁜놈' '내가 이정도까지 했는데 어떻게 너는 한번을 안들어주냐' "윤찬아, 엄마는 이제 니가 영어로 동영상을 봤으면 좋겠어"라고 아이에 요청했을 때, 윤찬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알았어"라고 얘기한다.
나는 순순히 내 말을 따라오는 윤찬이를 보면서, 그 순간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 내 욕구를 위해서, 아이의 욕구를 꺾어버린 나쁜엄마. 조금만 참을껄, 그냥 나둘껄이라는 마음이 바로 올라와버린다. 그래서 아이에게 바로 이렇게 말해 버렸다. "아니야, 아니야. 윤찬아, 너 보고 싶은거 봐. 엄마 진짜 괜찮아" 아이는 이미 마음이 상했는데도, 나는 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아이에게 이중 덫을 놓는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나쁜엄마가 되고싶지 않아서, 입안에 꾹꾹 NO라는 말을 감춰둔다. 그러나 그것은 곧 분노로 폭발하고, 모든 죄를 아이에게 뒤집어 씌운다.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든건 엄마이면서, 결국 내 말을 따라주지 않은 아이를 나쁜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엄마는 아이의 '싫어' '안돼'라는 말에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엄마가 NO라고 얘기 하지 못하면, 아이는 그 어떤 선택도할 수 없다. 엄마가 자기 마음의 경계를 알고 아이에게 단호하게 요청했을 때 아이는 그 경계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그 요청에 따른선택은 결국엔 아이의 몫이지 엄마의 몫은 아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단호하게 아이에게 요청했는가. 얼마나 아이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표현했는가.
엄마가 엄마의 마음을 얘기해주지 않으면서, 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그저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역기능가정'과 무엇이 다를까. NO라고 얘기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고 건강한 것이다. 아이도 그 건강함을 보고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을 단호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선택할 수 있다. 아이를 위해 NO 할 수 없음이 아니라, 사실은 좋은 엄마의 틀에서 나를 버리고 싶지 않음을 인지하자. 내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을 때, 엄마의 말대로 따라주고 안따라주는 것 또한 결국은 아이의 선택임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