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을 움직인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새로운 길을 열어 사회를 바꾸는 혁신가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해 순간의 열광을 이끌지만 책임지지 않는 선동가다. 두 부류는 겉으로 보기엔 모두 대중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지만, 남긴 결과와 흔적은 크게 달랐다. 혁신은 장기적 진보를 남기지만, 선동은 일시적 광열과 이후의 혼란을 남기곤 한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를 실험하던 도시였다. 이 시기에 페리클레스라는 정치가는 민주 제도를 정착시키고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민회와 배심제를 확대해 하층 시민의 참여를 늘리고, 예술과 학문을 후원해 아테네를 그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후대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페리클레스 사후 등장한 클레온은 달랐다. 그는 군중을 선동해 전쟁을 확대하고, 반란 도시 미틸레네 주민 전원을 학살하자는 과격한 안건을 통과시키려 했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클레온을 “아테네 최초의 선동정치가”라 기록했다. 같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한쪽은 제도를 성숙시켰고, 다른 쪽은 분노와 두려움을 부추겨 단기적 힘을 얻었을 뿐이다.
20세기 초, 제국이 무너지고 세계가 격변하던 시기에도 혁신과 선동은 나란히 존재했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잔해 위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웠다. 그는 술탄과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아랍 문자를 라틴 문자로 바꾸며,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세속주의 개혁을 통해 터키를 근대 국가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 등장한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패전과 경제 위기로 분노한 독일인들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유대인이 독일을 배신했다”는 허구의 음모론을 퍼뜨리고,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을 뒤집겠다”는 선동으로 지지를 끌어모았다. 합법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후 그는 민주 제도를 파괴하고 전체주의 독재로 돌변했다. 두 사람 모두 몰락한 제국의 잔해 위에서 출발했지만, 한쪽은 혁신의 길을, 다른 쪽은 파괴적 선동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대공황은 미국 사회를 휘청이게 했다. 이 위기 속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내놓았다. 은행 개혁, 공공일자리 창출, 사회보장 제도의 도입 같은 구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혁이었다. 그의 정책은 단기적 구호를 넘어, 미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휴이 롱은 “모든 가정에 집과 자동차, 연 $2,000 소득 보장”이라는 화려한 구호로 대중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재원 마련 방안은 불투명했고, 실제 정치 행보는 권위주의적이었다. 루이지애나에서 그는 사실상 독재에 가까운 통치를 했고, 연방 차원에서는 루스벨트를 좌익에서 공격하며 전국적 인기를 누렸다. 결국 암살로 생을 마쳤지만, 그는 대공황기의 불만을 극단적 구호로 엮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선동가로 남았다.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혁신가와 선동가의 대비가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불복종 철학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맞섰다. 소금 행진 같은 평화적 시위는 국제 여론을 움직였고, 결국 인도 독립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방식은 후대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간디의 비폭력 노선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독일의 도움을 받아 인도국민군을 조직했다. 그는 “피를 달라, 자유를 주겠다”는 강렬한 구호로 청년들을 결집시켰지만, 결과적으로 추축국의 패배와 함께 그의 길도 막을 내렸다. 목표는 같았지만, 방법은 정반대였다. 한쪽은 비폭력 혁신이었고, 다른 쪽은 무장 선동이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비폭력 직접 행동”을 전략으로 삼아, 워싱턴 행진과 버밍햄 캠페인을 이끌었다. 그의 연설과 운동은 결국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으로 이어졌다. 그는 증오 대신 화합을 제시한 혁신가였다.
반대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분리정책은 영원히!”라는 연설로 백인 대중의 불안을 자극했다.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몸소 막아 서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이를 통해 남부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인종차별적 선동으로 대중을 움직인 전형적인 데마고그였다. 같은 시기에 한쪽은 인권의 진전을, 다른 쪽은 인종 분열을 남겼다.
혁신가와 선동가의 대비는 과학사에서도 나타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지동설이 사실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를 “위험한 사상 선동”으로 몰아 재판했고, 그는 가택연금 상태로 생을 마쳤다. 진리는 결국 이겼지만, 혁신가는 당대에 ‘선동가’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했다.
비슷하게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개발했을 때도 반발이 거셌다. “소의 병을 맞으면 사람이 소처럼 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졌다. 188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반백신 선동가들이 군중을 부추겨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접종이 중단되면서 도시 인구의 2%가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과학적 혁신은 인류를 구했지만, 공포와 무지의 선동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이처럼 역사 속에는 늘 혁신가와 선동가가 함께 존재해왔다. 혁신가는 새로운 제도, 새로운 가치, 새로운 기술로 세상을 바꾸었고, 선동가는 분노, 공포, 증오로 순간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후대에 남은 유산은 분명히 다르다.
오늘날 사업 현장이나 커뮤니티 운영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나는 혁신가인가, 선동가인가?” 단기적 인기와 감정적 동원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책임을 지고 변화를 끝까지 이끌 혁신가가 될 것인가. 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인물들을 선동가로 기록하고, 답한 이들을 혁신가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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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I Alchemist & Maestro 두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