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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Oct 23. 2023

<감정 백일장> 1. 살갗이 벗겨진 손가락 때문이야

나는 왜 지금 ‘화’라는 감정을 느끼는가?


 오후 4시 22분

7번 버스는 단풍이 내려앉은 설악산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종점까지 가면 며칠동안 슬며시 보고싶던 단풍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의 해는 짧고, 5시가 다 되어 도착하면 어둑어둑한 기운이 좀 무서울지도. 어디로든 가고 싶어서 정거장에 막 도착한 버스를 탄 참이었다.


 아남프라자를 지나고 부영아파트 상가 정거장에서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탔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거의 다 지어가는 새 건물인데, 생긴 모습이 병원이나 정부 기관 느낌이 난다. 대리석을 깔기 전의 흙바닥 위에 겹겹이 쌓인 야외용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냥 이쯤에서 내릴까? 동그랗거 빨간 버스 벨을 눌렀다. 오후의 저물어가는 해가 6차선 도로를 마지막으로 밝게 비추고 있었다.


 조양 우체국 앞에서 한 번 작은 건널목을 건넌다. 메가박스 앞 건널목에서 잠시 기다리면 바닥에 심어진 조명등이 초록색으로 밝아온다. 이쪽으로 오랜만에 왔더니 엑스포 공원의 가로수가 절반쯤 물들었다. 주말에 갑자기 추워져서 얇은 패딩 조끼를 입고 나왔는데,20도로 기온이 오른 날씨에 조금 더운 느낌이 든다.


 목적지는 할리스 커피.

금액권에 남은 돈이 있는 게 생각나서 이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할리스 속초 엑스포점은 예전엔 호주식 플랫화이트를 파는 개인 카페였다. 그러다 속초 최초의 할리스 커피가 되어서 손님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2층 창가에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책상자리가 있고, 창 밖으로 울창한 벚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몇 년 전 봄에 우연히 왔다가 아름다운 벚꽃을 보고 좋아서 내년에도 꼭 와야지 생각했다. 지금은 창 밖에 KFC가 보인다. 그 때 본 벚꽃이 마지막이었다.


 엑스포 공원의 인조잔디 운동장을 중심으로 스타벅스, 드롭탑, 투썸 플레이스, 할리스 등의 프랜차이즈 카페 뿐만 아니라 먹거리촌이 형성되면서 개인 카페도 많아졌다. 어쩌다 한번씩 여기 할리스커피에 오면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대화 하러 들른 중년의 고객이 주로 보인다. 벚나무는 없어도 여전히 창가 자리가 좋아 이곳에 앉았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영랑동 바다뷰 할리스와 같은 파란색 거품 손 세정제가 있었다. 대용량인데다 왠지 피부의 기름기를 싹 빼갈 것 같은. 건조해서 핸드크림을 꺼내 발랐다. 꺼끌거리는 검지 손가락 왼쪽이나, 거스름이 일어난 손톱 밑을 들여다본다. 살갗이 벗겨진 검지 손가락에도 핸드크림을 발랐다. 얇게 말라있던 상처가 떨어져 나갔다.약간 멍이 든 것 같기도 하다. 매일 거칠게 다루다가 어쩌다 한 번 향기롭게 대해주면 다인가싶다.


 매일 객실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오늘도 왠지모르게 시간에 쫓겨 서둘러 카트를 밀다가 객실 도어락과 카트 손잡이 사이에 검지손가락이 끼어버렸던 것이다. 물을 만졌다 말랐다 바싹 마른 피부가 그대로 쭈욱 밀렸다. 다행히 아주 얇은 피부층이었는지 피가 나지는 않았다. 새로 린넨을 갈며 혹시 피가 묻지는 않을까 몇 번 손가락을 확인했다. 이불 린넨을 갈며 바라본 베란다 너머 바다는 파랗게 빛났다.


 이 시간동안 몸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지난 일 년 동안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보니, 순서를 익혔다. 혼자 하는 일이라 청소 중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나 오디오북, 유튜브를 듣는다. 어떤 날은 “그래, 운동하는데 돈도 준다. 게다가 오며가며 여행 온 사람들을 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고, 숙박업이 돌아가는 시스템도 배울 수 있잖아?” 라고 생각하며 기분좋게 움직인다. 날씨가 흐린 날은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어떻게 지내는지 서로 안부를 물을때, 왠지 슬쩍 넘어가게 되기도 한다.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객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는 기분이 영 그래서 어디든 가보자 싶어서 버스를 탔다. 7번은 속초 시내버스니까 기본 요금으로 끝까지 갈 수 있고, 종점은 내가 좋아하는 설악산이니까. 설악산은 요즘 한창 단풍이 들었을테니까. 그러다 생각치 않았던 할리스 커피에 와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단풍을 보면 풀릴까? 싶었던 기분이 독수리 타법으로 (아이패드 가로모드로 쓰고있음) 타닥타닥 글을 쓰는 사이에 좀 누그러진 것 같다.


 살갗이 벗겨졌기 때문일까. 어제부터 시작된 생리 때문일까.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선택을 미루는 지금의 내 모습 때문일까. 여러가지 기분이 쌓여 갑자기 화가 난 김에, 생생한 감정을 담아 써보고자 일종의 백일장처럼 실시간으로 써보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감정 백일장’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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