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빠!
의자에서 머리가 딱 떨어지는데,
응애-하는 소리가 나는거야
또 시작이다. 아빠는 술 한 잔에 기분이 좋은 날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3대 1로 싸운 이야기, 어릴 때 친구들이랑 수박 서리 한 이야기, 좋아했던 여자 친구와의 사연(엄마는 지금 들어도 싫어하는), 여러 레퍼토리가 돌아간다. 그 중에 여러 번 들어도 좋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의 일이다.
아빠는 횟집의 주방장으로 오래 일했다. 지금은 주 5일 근무가 보통이고, 식당도 주 1회 휴무는 기본이지만, 삼 십 년 전만 해도 달에 이틀 정도의 휴일이 고작이었다. 아침 열 시에 출근 해 밤 열 시에 끝나는 일이 고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신 막 달의 엄마는 나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초조한 며칠을 보냈다. 젊은 아빠는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후배들을 만났다고 한다. 하도 졸라대어 근처 포장마차 에서 술을 샀다. 새볔이 되어 집에 왔는데, 캄캄했다. 엄마 혼자 애 낳으러 간 거 였다.
비틀 비틀 취했던 다리가 놀라서 번쩍 서고, 무작정 동네 언덕 위를 달렸다.
택시를 타지 그랬어?
내가 묻는 말에 아빠는 싱글 벙글 하며 대답했다.
아이, 그러면 되는데 그 땐 그럴 정신도 없었어.
한참을 달리다 보니, 지금 왜 뛰고 있나 싶더랬다.
도착한 속초 의료원에서 외할머니와 밤새 나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아빠. 막상 병원에 가니 긴장이 풀려서, 술 기운이 올라와 쿨쿨 잠을 잤다고 한다. 아이고 아부지~ 곁에 계신 외할머니 마음이 어떠셨을지. 못말리는 아빠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잠결에 머리가 쿵! 하고 떨어졌는데, 그 순간에 바로 내가 태어났다며 매 번 신기해 하는 아빠였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직접 옥편을 찾아 지어주셨다. 집안 첫 손주라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후보도 있었다. 돌림자로 ‘있을 재’를 써서, 하나는 ‘재란’이, 하나는 ‘재경’이었다. (‘있을 재’에 ‘서울 경’자를 썼다. 재경이가 되었다면 지금 서울에 있었을지도…) 질색하며 거절한 아빠 덕분에 ‘민주’라는 예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엄마도 아기 이름으로 생각 해 둔 게 있었다고 한다. 한글 외자로 ‘슬’이. 성이 ‘이’이고 이름은 ‘슬’이라니. 상상하면 가녀린 예쁜 아이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4.8키로 우량아로 태어나 언제나 반에서 제일 컸던 아이다. 분명 놀림거리가 되었을 거다. 민주로 살면서 이름 때문에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 다만 ‘민주주의’를 배우던 날 수시로 나를 뒤돌아보던 유치한 초딩 남자애들이 있었을 뿐.
의자에서 자다가 바닥에 머리를 찧는 순간 만난 첫 아이, 직접 이름을 짓고 기르며 아빠는 행복했을까?
술, 그 놈의 술이 문제다. 건강을 과신했던 아빠는 너무 젊은 나이에 나의 곁을 떠났다. 마지막 삼 년 간 우리는 꼭 붙어서 지지고 볶으며 시간을 보냈다. 인생의 방학 동안 같이 여행도 다니고, 건강하게 살면 좋았을 걸.
매일 술을 드시던 아빠는 어느 날 밤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리고 곧장 중환자실로 옮겼다. 간 수치가 아주 높았고, 장기 부전도 함께 왔다고 했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빠를 볼 수 있는 건, 하루 두 번 면회 시간 뿐이었다. 병원 의자에서 나와 만날 때를 기다리던 아빠처럼, 나도 병원 의자에서 아빠와의 마지막 인사를 문득 상상했다. 천 년 같이 긴 시간이 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도 잘 안나는 이상한 시간이 흘러갔다.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는 가족들이 충분히 슬퍼 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특히 성인이 된 자녀라면, 어른들 품에 안겨서 마냥 울고만 있을 수가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장례비를 치르고, 계약서를 쓰고, 손님도 맞이해야 한다. 정해진 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 와서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다. 야금 야금 아껴가며 슬프고 있다.
그래서 나의 애도는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