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을 메우는 밥과 국물, 반찬의 파도

<전라북도>(1) 남원시 추어탕

by 투가든

봄을 앞두고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눈 쌓인 지리산이 보고 싶어서 장비를 챙겼다.

지리산은 2월 15일부터 4월 30일까지 봄철 산불 조심 기간에 들어갔다.

주요 능선 탐방로 출입이 통제됐다.


모든 길이 막힌 것은 아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지리산국립공원 운봉분소를 들머리로 바래봉 정상에 닿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눈 쌓인 바래봉에 서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바래’란 이름 때문인가?

지리산에 ‘바라’는 게 많아 올랐는데 정상에 서니 ‘바라’는 게 사라지는 신묘함을 느껴서?

추어탕 단골집에 가기 위해 바래봉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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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 남원시다.

시내에서 차를 몰고 30여분 정도 가면 운봉읍 혹은 인월면에 닿는다.

개인적으로는 바래봉에 갈 때는 운봉으로, 천왕봉 갈 때는 인월로 간다.

산에서 내려오면 남원의 상징 음식 ‘추어탕’을 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월에서 운봉을 거쳐 남원시로 들어갈 때 인구 감소, 고령화, 지역 소멸의 위기를 현실로 체감한다.

지리산을 갈 때마다 사람과 마을, 일상의 공백이 더 넓어졌음을 확인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 먹는 음식, 느끼는 정서와 문화를 사라지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일까.

소멸의 위기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노포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일종의 사명처럼 여기게 됐다.




남원 갈 때마다 찾는 추어탕집도 마찬가지다.

허름한 간판과 문에 이끌려 들어간 곳이다.

난로가 온기를 피우고 있고 몇 테이블에서는 어르신들의 술잔과 수다가 소란스레 부딪히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가 등산 복장을 한 나를 보고는 배고픔의 정도를 금세 짐작하셨다.

고봉밥과 남도 반찬의 향연을 테이블에 펼쳐 놓으셨다.

추어탕 나오기 전에 밥 크게 한 술 뜨고, 그 위에 파김치 싸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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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추위를 녹이는 건 뜨거움이 아니었어.

정(情)을 채운 밥과 국물, 반찬의 파도였어.


황홀감을 채우다 보니 밥과 반찬이 절반 정도 줄었다.

추어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불편한 걸음을 하시며 할머니가 뚝배기를 들고 와 테이블에 놓으신다.

마른 목을 국물로 채우고 있는데 할머니가 다시 오셔서 더 높아진 높이의 밥과 반찬을 놓고 가신다.

오랜만에 젊은 친구가 와서 씩씩하게 밥을 먹는 모습이 귀엽거나, 애틋해 보였을까.

밥과 반찬, 국물의 파도가 말 그대로 물밀 듯이 밀려온다.

마음의 공백을 채워 소멸의 걱정을 잠시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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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일은, 노포 기록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며 주어진 밥과 국물, 반찬을 싹 비우는 것이며,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다.

추어탕 국물의 칼칼함은 밥의 고소함을 만나 균형을 이룬다.

밥맛이 평범할 즈음 남도 김치의 감칠맛이 다시 입맛을 돋워 국물을 부른다.

매력을 넘어 마력을 부르는 끝없는 맛의 순환이 국밥에 소용돌이친다.

소멸을 지연시키는 국과 밥, 반찬의 힘, 그 힘을 유지하는 사람의 마음, 노동의 감사함을 품고 지리산, 추어탕과 만남을 기약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