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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luck Oct 09. 2020

일본에 대한 담론의 변화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을유문화사)

한창 일본을 배워야 하니 말아야 하니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90년대 후반, 일본인 있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들로부터 시작해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던지 여러 일본 관련 책자가 출간되었었다. 일본은 있다, 없다고 한 책들은 서로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현격해서 그 당시 그 책들은 접했던 중학생 꼬마는 뭐가 맞는 건지 헷갈렸었다. 그런 와중에도 -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는데 - 그 중학생 꼬마는 암암리에 일본 에니메이션과 일본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부터인가 일본에 대한 담론을 담은 책들을 보면, 예전 일본은 있네 없네 하던 때보다 사뭇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색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시절 선조들이 겪은 말로는 다 못할 피해나 독립 이후에도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들에 대한 성토가 주 소재였다고 하면, 지금은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의 비교에 더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 루스를 비롯한 서양사람들은 일본을 희한한 나라라고 인식했던 것 같다. 천황의 이름하에 행해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바로 태세를 바꿔서 미국에 저항하지 않고 미군정을 승인하고 인정하고 바로 받아들인데 대한 1차적인 당혹감, 그리고 천황을 전범으로 지목하지 못하게 한 데 대한 어이없음이랄까. 저자의 설명대로 일본은 천황제가 시작되면서부터 충이라는 이념으로 쇼군과 다이묘들이 체계적인 카스트를 유지해왔다. 그 이념 하에서는 자기가 자기의 카스트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충에 더불어 효라는 개념까지 더해져서 국가와 가족 내에서의 카스트도 공고히 유지됐다고 보았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일본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토대가 된 것이다.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인 충이나 효를 나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역자가 아닌 다른 분의 해설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한 번 읽을 때는 일본과 우리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지만, 다시 읽으면 일본과 우리의 차이점을 알게 된다."라고 하면서 충이라는 이념이 (고루하고 답답하고 경직된 이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 이건 내가 더한 말이다) 국가와 국민의 결속 -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 을 공고히 한 효과가 있어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부분이 있으며, 신분제에 발목 잡히지 않은 근대화가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와는 다른 근대화를 이뤘다는 설명이다.

일본은 없다, 있다 책이 한창 팔리던 그때에는 일본을 그저 이기기 위해서, 즉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일본에 대한 정보에 접근했었지만, 요새 나오는 일본 관련 저서를 보면 - 물론 너무 일본 잘했다는 식의 책도 있어서 문제지만 - 일본과 우리의 근대화를 비교하면서 조선이 근대화에 뒤처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과정을 냉철히 고찰하는 책들이 많다. 이제는 이 "국화와 칼"도 일본이 이런 나라이고 일본인이 이런 성향을 지녔구나 하는 정보를 습득하는 선을 넘어서, 일본인들이 이런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주목했고,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성향들이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가게 만든 면이 있었다는 정보를 주는 작품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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