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의해 끝이 정해진 삶
나를 보내지마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인간은 생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온갖 노력을 하면서 살아간다.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심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잊고 살려고 애쓴다. 인간 개개인이 속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때로는 본능에 따르기도 하고, 이성에 따르기도 하고, 여러가지 수없는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결국에는 살아간다.
본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근원자"를 위해 장기를 기증할 목적뿐이다. 장기를 기증하다가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 것이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 태어난다는 표현이 적합한가... 만들어진 존재들인데 - 기숙학원 형식의 공동체에서 그들을 통제하는 "선생님들" 손에서 자라난다.
만들어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므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표현되지는 않지만, 아마 학교에서 그들에게 그들이 결국에 맞이할 운명은 장기가 다 빠지고 나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장기의 기증자로서 삶을 살아가다가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다지 동요하거나 그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한다던지 하는 모습은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이들은 오히려 마음 아파한다. 놀라우리만치 침착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어 세상에 나가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상태로 "근원자"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에 대해서 자신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다투기만 할 뿐이다. 그와중에도 남녀간에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검증받아서 기증될 날을 미루고자 하는 열망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보통의 인간처럼 직장을 갖고 가정을 이루면서 살 수도 없다. 정해진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도 들어차 있다.
소설 후반부에서 그들에 대한 비밀이 조금 드러나기는 한다. - 모든 사건에 대한 궁금증은 다 풀리지 않는다. - 애초부터 클론으로 만들어진 존재인데, 당초에는 인간적으로 다루지 않다가 사회의 비난에 못이겨 학교형식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그들을 키웠다는 것. 외향적으로나 행동하는 것으로보나 인간이기에 그렇게 하는게 낫다고 생각해서 장기가 털려 죽을 그 순간까지 인간적으로 가르치고 키워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남녀간에 사랑한다고 해도 기증의 시기를 미루는 것은 없다는 것. 결국 아무리해도 벗어날 길은 없다는 데 대한 확인이다.
운명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거스를 수는 없다고들 한다. 철저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인격.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계층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을 놓고 보면, 우리가 아무리 자존감을 가지고 나름의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고 자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생각이나 관념조차도 내가 속한 사회에서 빚어져 나에게 스며든 것이고 그 스며든 요소들은 내 인생에 걸쳐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한다면, 소설속에서 주인공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불합리한 운명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가면서도, 인생이란 것이 이정도로 간단하고 허무하게 형성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충분히 우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