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고관절 골절 수술을 한 것이 작년 6월 초였으니까. 두 달하고도 보름을 병원에 있다가, 8월 중순에 집으로 돌아갔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지나온 계절은 지금 겨울 한가운데에 있다.
열려있던 창문은 겹창까지 꼭 닫혔고, 침대 위 전기장판은 24시간 켜 있다. 이불은 한 겹씩 늘어갔다. 엄마는 늘 그 자리에 누워있다. 마치 여름에서 겨울로 바로 건너오기라도 한 것처럼.
작년 9월과 10월,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해지던 그때쯤 엄마는 상태가 좋았다.
식사도 잘했고, 정신도 맑았다. 식사를 잘하고 수면 리듬이 제 자리를 찾으니 인지능력도 회복되었다. 드나드는 자식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간다고 하면 차조심하라는 당부도 했다. 병원에 있을 때처럼, 지금 갔다가 언제 또 오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는 침대 윗부분을 15도 정도 세워달라고 했다.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으면, 가끔 내가 묻지도 않은 처녀 때 얘기를 했다. 8남매의 막내인 엄마가 큰외삼촌의 큰 딸, 그러니까 조카딸보다도 한 살이 어렸다는 얘기, 나한테는 큰 외숙모(나는 뵌 기억조차 없다)인 큰올케 언니가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는 얘기. 나이가 한 살 많은 조카와 어린 고모는 서로 시샘도 했나 보았다. 그 조카는 엄마보다 일찍 시집을 갔고, 남편을 잘 못 만나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고 했다. 엄마에게 조카들은 자매였고 친구였다.
맏이인 언니와 다르게 나는 외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언니의 외가 추억여행은 낯설어서 엄마 치마폭을 꽉 붙들고 들어갔던 장면에서 시작한다. 며칠 지나면서 친해져서 장난치고 놀았던 얘기는 몇 번 들어도 물리지가 않는다. 옛날이야기는 구수하다. 얼갈이배추를 넉넉히 넣고 끓이는 여름 된장국 냄새가 난다. 언니와 엄마의 얘기를 듣다 보면 퍼즐이 맞춰지고는 했다. 큰외삼촌 밑에 둘째 외삼촌, 그 밑에 셋째 외삼촌, 그 아래 큰 이모… 00 언니는 둘째 외삼촌 큰딸, **언니는 넷째 외삼촌 막내딸. 이런 식으로 외가 가계도가 그려졌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식구가 많기도 하고, 내가 직접 만나지 못한 분들에 대한 얘기는 몇 번 들어도 쉽게 잊혔다.
막내인 나까지 낳고 나서 엄마는 친정에 갈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외가에 가지 못하는 대신 엄마는 결혼해서 고향을 떠나온 조카딸들과는 종종 만났다. 그 집에 가서 며칠 묵으며 놀다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갔다. 엄마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조카딸은 나에게는 외사촌 언니였고, 그 언니의 딸은 나보다 두 살 어렸는데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언니는 유난히 엄마와 친했고, 엄마를 챙겼다. 00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 언니는 밝고 재미있었다. 뛰어난 친화력에 다정함, 유머 감각까지 갖춘 엄마의 절친이었다.
엄마 구순 잔치를 했을 때, 외가 식구들에게도 알렸다.
외삼촌, 이모들은 다 돌아가시고, 넷째 외삼촌 한 분만 생존해 계셨는데, 노환으로 참석하지는 못하셨다. 몇몇 외종 사촌 오빠들과 언니들이 앉은 테이블로 가서 인사를 하면 “잉, 그려. 니가 00이여? “라고 묻는 언니들의 질문과 말투는 똑같았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다 깔깔 웃는 모습이 소녀 같다. 이젠 다들 노인이지만, 정답고 유쾌했다. 그녀들만의 연대가 느껴졌다고 할까.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엄마는 행복했겠구나, 든든했었겠구나. 별처럼 반짝였겠구나.
조심조심 엄마의 손톱을 깎는다.
무뎌진 엄마의 손톱깎이에서 오래된 손톱조각이 잘라진다. 손톱에 머물렀을 엄마의 젊은 날이 떨어진다.
배변패드의 뽀송함으로 존엄성이, 욕창이 있고 없음으로 건강이 증명되는 시간은 왜 이다지 잔인한가.
우리가 갈 길인, 외로운 이 길을 가는 내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은 또 왜 이리도 슬픈가.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