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구십팔 세 <16. 엄마 보러 가는 길>

by 지우



엄마가 “초간장“ 하고 말했다.

연출: 없음, 촬영: 형부, 출연: 엄마/언니인 영상 속에서이다.

엄마가 언니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다 겨우 할 수 있었던 한마디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초간장? 반복재생을 해본 결과, 어떻게든 말을 시키려던 언니 얘기 중 한 단어를 엄마가 따라한 것이라는데 심증이 갔다. 그렇다고 해도 발음은 정확했다.

이어서 검지를 입가에 대고 엄마가 웅얼거린다. “응,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고요?” 하는 언니의 애처로운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다. 영상 뒷부분에서 엄마는 간절한 눈빛으로만 말하고 있다.


엄마 보러 가는 길.

버스를 이용해서 우리 집에서 부모님 집까지 가려면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은 걸린다.

시내버스를 탄 후 광역버스로 갈아타거나, 반대로 광역버스를 타고 가서 경기도 시내버스로 바꿔 타거나,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집 앞 정류장에서 광역버스를 타면, 강을 왼편으로 끼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리는 드라이브 코스는 덤이다.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안전띠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얼마쯤 가다 보면 강이 나오고, 그러면 숨이 탁 트인다. 일렁이며 반짝이는 강표면을 보게 되면 그것도 좋다.

자동차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버스 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감상하고, 계절을 느끼고 사색을 하는 호사를 누린다. 겨울에는 히터 온기에 노곤해져 나도 모르게 달콤한 쪽잠을 자기도 한다.

눈 쌓인 겨울, 벚꽃 흐드러진 봄, 사방이 초록으로 빛나는 계절의 한가운데 풍경도 좋지만, 나는 지금처럼 다른 계절로 건너가는 때가 더 흥미롭다.


3월 초. 겨울은 벗어났다지만 아직 먼 산봉우리 위에는 희끗한 잔설이 있고, 팔랑거리며 떨어지던 눈송이가 비로 변하거나, 섣부르게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매운바람이 위세를 부리는 때다.

나무가 풍성한 초록의 옷을 입으려면 앞으로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얼음물처럼 차가우나마 봄비를 맞고 난 가지들은 무언가 다르다. 해를 향해 몸을 더 곧추세운 것 같기도 하고, 깊은 곳에 잎이나 꽃망울을 품고 있는 것처럼 통통하고 활기 있어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저편까지 보인다. 이편 강가 공원, 흘러가는 강, 그리고 강 건너 아파트숲. 잎 우거진 여름이었다면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없을 거였다. 고개를 돌려 도로 오른편 가로수를 본다. 부챗살 퍼지듯 나무 끝쪽으로 갈수록 가지가 촘촘해지는 저 나무는 뭐였더라? 위로 자라기보다는 옆으로 한껏 퍼진 수형树形 을 보니 벚나무가 맞다. 그 옆 나무의 가지는 훨씬 가냘프고 모양이 성글다. 이름을 추측하려 애써보지만, 가물거릴 뿐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고 꽃이 피었을 때 지나가면서 확인해 보자고 마음먹는다.

나무 중간에 걸려있는 공모양의 구조물. 지난가을 떠나버린 새의 보금자리일 텐데, 가지 하나하나 엄선하고 공을 들여 만들었을 둥지를 두고 어디로 가버린 걸까. 당장 다른 새가 들어와 살아도 될 만큼 견고해 보인다. 새들도 터를 따지는지, 이런 빈 둥지가 두세 개씩 달려있는 나무도 있다.

막히는 구간이 없는 도로를 버스는 빠르게 달려, 강물이 도로 위에 있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구간으로 나를 데려왔다. 볕이 좋았다면 짙은 파란색이었을 강물이 잔뜩 흐린 날씨 때문에 회색으로 보인다. 강 건너 아파트 숲은 어느새 사라졌고, 겹겹이 쌓인 산의 실루엣이 나타난다. 먼 곳에 있는 산일수록 색이 흐릿해서 하늘과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갈매기들은 떼 지어 날거나, 물 위에 떠있다. 장관이다. 강도 나무도 새도 깨어났구나. 삭막하다고만 느꼈던 이 도시가 숨겨두었던 아름다움을 나에게만 살짝 보여준 느낌이다. 이 노선버스가 강을 끼고 이렇게 오래 달린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직진하던 버스가 급히 우회전을 하더니 국도로 접어든다.

창밖 풍경이 한층 가까워진다. 은색, 검은색의 비닐하우스, 작년 가을 수확한 벼 그루터기가 줄지어 남아있는 논, 날이 더 따뜻해지면 여린 초록의 잎으로 가득해질 밭. 나지막한 야산, 저층의 건물과 단층집들. 대도시를 떠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풍경은 달라지고 나는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버스를 타고 엄마를 보러 가는 길은 매번 설레고 새롭다. 본 적 있어도 잘 모르겠고, 기억하고 있다 해도 처음 보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여정 끝에 엄마가 있다.


엄마의 몸에서 근육과 힘이 빠져나가는 속도로 언어도 사라졌다. 하루 중 잠에서 깬 몇 시간, 자식 중 누군가 와서 야윈 얼굴에 차가운 얼굴을 대고 입을 맞추는 바람에 깨어난 엄마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옹알이하는 아기처럼 눈을 맞추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으로 꺼내고 싶지만, 단어도 근육을 움직이는 법도 잊어버렸다. 하루하루 점점 더 많은 것을 잊어가는 엄마는 그래도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엄마와는 다르게 차를 타고 오는 길의 풍경은 굳건하다. 변화하지만 쇠락하지 않는다. 오는 동안 버스에서 본 세상은 늘 엄마 생각과 뒤엉킨다. 그러더니 꽃망울을 키우기 시작한 벚꽃나무 가지가, 농부의 손길로 쑥쑥 자라는 비닐하우스 속 작물이, 멀어질수록 색도 실루엣도 희미해지는 산까지도 다 엄마가 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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