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홍옥사과가 시장에 나왔다.
사과가 이미 우리 집 냉장고 서랍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면서, 홍옥사과가 반가워서 지나치지 못하고 그예 사고 만다.
이럴 때 나는 사과를 사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의 나, 나의 추억을 사는 것이다.
원래 홍옥사과는 초가을 무렵 시작해 잠깐 나왔다 들어가기도 하지만, 다른 품종에 밀려서인지 요즈음은 거의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 귀하디 귀한 사과이다.
과일가게 사장님이 얼마나 빤짝빤짝하게 윤이 나게 닦아 놓았던지, 마치 진열대 위에 커다랗고 빨간 알전구를 줄 맞춰 켠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먹성 좋은 아이였다.
가리는 것이 없기도 했거니와 많이 먹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안 식탐의 내력은 대대로 할머니에서 아버지로 넘어와 나의 두 남자 형제들을 용케 비껴간 후, 언니하고 막내인 나, 두 딸들에게 굳건하게 전해져 내려왔다.
나랑 터울이 많이 지는 언니와 큰오빠는 애당초 먹거리 경쟁자가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나는 늘 나보다 두 살 많은 작은 오빠하고 경쟁했다.
그 경쟁에서 대부분 내가 승리했는데, 왜냐하면 오빠는 입이 짧고 먹는 속도도 나보다 느리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먹거리 경쟁에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늦여름, 초가을 즈음부터 엄마는 홍옥사과를 열심히 조달해 주셨다.
그때 사과 품종이라고 해야 주로 홍옥과 국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른 가을에 시작해 홍옥을 먹고, 홍옥이 들어가면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에는 국광이라는 알이 작고 못난 사과를 먹었었다. 국광의 풍미는 홍옥과는 또 달라서 향도 달랐지만 맛은 홍옥보다는 더 단맛이 돌았고, 과육은 단단했다. 추운 겨울 아버지가 사 온 누런 종이봉투에 담긴 얼기 바로 직전의 국광사과는 달고, 이가 시리게 시원했다.
냉장고는 지금처럼 큰 것이 나오지 않았던 때라서, 우리 집에 온 모든 홍옥사과는 예외 없이 커다란 대나무 광주리에 담겨 마루 어디쯤에 놓이고는 했다.
씻기는 뭐 제대로 씻기나 했을까, 먹고 싶을 때 하나 집어서 흐르는 수돗물에 잠깐 대고 섰다가 이내 사과든 팔목을 휙휙 빠르게 털어 물기를 없앤 후 먹고는 했다.
홍옥을 와삭, 한 입 베어 물고 깨진 빨간 사과 껍질 밑에서 희디 흰 과육이 드러난다 싶으면 바로 새콤한 과즙이 입안을 적셨다. 사과에서 떨어져 나와 껍데기와 같이 입 안으로 들어온 덩어리를 씹고 있자면, 사과 광주리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었던 진한 홍옥사과 향이 가까이서 부드럽고도 강력하게 콧 속으로 들어왔다.
살이 연해서 어린 내가 욕심껏 베어 물면 큰 덩어리가 떨어져 나오고는 했으므로, 알이 그리 크지 않은 홍옥사과 한 알은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건넌방에서 안 방 갈 때 한 개, 안 방에서 주방으로 갈 때 또 한 개, 방과 마루를 하루 종일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이 오고 가며 하나씩 먹다 보면 광주리는 눈에 띄게 비어갔고, 나보다 사과 광주리를 기웃거리는 빈도가 낮은 작은 오빠는 정작 먹고 싶을 때 없어서 못 먹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홍옥 사과가 세상 과일 중에서 제일 맛있기도 했지만, 작은 오빠가 다 먹어버리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나를 ‘사과 호주’(‘호주’라는 말은 지금은 쓰지 않는 방언인 듯한데, 대장이라는 뜻이었다고 기억한다)라고 부르고, 농담으로 과수원 집으로 시집보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정도로는 나는 사과를 좋아했다.
부모님의 바람? 과는 다르게 나는 과수원 집 아들과 결혼하지는 않았다.
나의 식탐은 건재해서, 결혼한 후에는 작은 오빠 자리에 남편을 세워두고 경쟁하고는 했다.
부침개는 바로 부쳤을 때, 입천장 데어가며 먹어야 제 맛이고, 과일은… 과일은 당연히 있을 때 빨리 먹어야 되는 것이 만고불변의 세상 이치 아니었던가? 나는 그 이치를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홍옥사과를 하나 씻어 크게 한 입 베어문다.
약간은 푸석한 과육이 새콤한 과즙과, 향과 합주를 한다.
나는 지금 사과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다. 추억을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