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병원에서의 두 달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엄마는 섬망이 올 정도로 심신이 허약했고, 재활은 요원해 보였다.
재활이라는 희망을 붙들고 엄마를 이 좁고 복잡한 병원에서 계속 지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재활을 포기할 것인가.
어둡고 긴 터널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경제적인 문제도 그랬다. 매달 지불해야 하는 병원비에, 간병비 그리고 기타 물품비.
병원비는 그렇다고 쳐도 간병비는 정말 부담이 됐다. 간병보험을 왜 안 들어 뒀을까 하고 후회했다.
생각보다 수술비는 많이 나오지 않았었다. 수술비와 재활병원 두 달 입원비는 아버지가 통장을 털어 내주셨다. 간병비와 기타 물품비는 ‘형제 기금’으로 우선 충당했다.
말이 기금이지, 잔고는 소박했다. 수년 전에, 부모님 관련해서 쓸 일이 생기지 않겠냐는 언니의 제안에 따라 월회비 형식으로 걷고 있는 돈이었다. 거기에다 자식들이 드린 용돈을 안 쓰고 차곡차곡 모았다가 맡긴 엄마 돈을 합했다. 그 돈을 다 쓰고 난 후에는, 엄마를 돌보느라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넷이서 똑같이 나눠 내기로 합의를 봤다.
엄마를 어디로 모실까.
엄마도 엄마지만, 아버지를 혼자 지내게 하는 일도 늘 마음이 쓰였다. 엄마와 아버지를 각각 병원과 집에서 동시에 케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요양병원이냐 집이냐.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했다. 의견은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이 맞다는 쪽으로 점차 기울고 있었다.
언니는 평소 친한 형님들의 의견을 자주 구했다(언니는 지인 중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언니’ 대신 ‘형님’이라고 불렀다). 처음 겪는 일인 데다가, 맏이로서 어떻게든 동생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였다. 그분들은 살면서 닥치는 가지가지 일을 언니보다 먼저 겪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에 따라 해결했던 경험이 있으니 그분들의 조언들이야말로 다양성이 갖춘 데이터였다.
어느 늦은 밤,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를 일단 집으로 모시는 게 어떨까. 한 달 만이라도. 엄마가 집에서 편하게 지내고, 반찬 만들어서 집 밥 드실 수 있게. 좁고 어두운 병실이 엄마는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러면 아버지도 돌볼 수 있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마치 그렇게 물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는 대답이 나왔다.
“나?… 나야 당연히 엄마가 집에 편히 있는 게 좋지!”
이렇게 해서 엄마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한 달만 이라도’라는 말로 어쩌면 언니와 나는 현실 도피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 안 되겠으면 그때 요양병원으로 모시자 라는 그럴싸한 핑계 뒤로 말이다.
엄마가 집에 가기까지 과정과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짐작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 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뭉개버렸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일은 정 많고 오지랖 넓은 언니와 대책 없이 그저 엄마가 불쌍하기만 했던 나 이렇게 둘의 합작에, 오빠들의 묵인으로 실행되었다.
재활병원에서 퇴원할 때, 언니와 나를 착각했던 간호과장님과 마주쳤다고 한다.
당연히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줄 알았던 그분은 엄마가 집으로 간다고 언니가 그러자 놀라더라고 했다.
“아, 그러세요? 자녀분들 대단하시네요.”
우리가 대단한지 아닌지, 옳은 결정을 했는지 아닌지 우리도 몰랐다.
엄마가 집에서 지내려면, 준비를 해야 했다.
고장 난 냉장고를 버리고, 새 냉장고와 이불 빨래를 할 대형 세탁기를 샀다. 환자용 침대를 구하고, 입주가능한 요양보호사를 수소문했다. 엄마가 쓸 방을 치웠다. 방을 꽉 채우고 있던, 연식으로 따지자면 무려 내 나이와 비슷한 것도 섞여있는 무용의 구닥다리 물건들. 그런 것들이 뭐라고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작은오빠가 며칠에 걸쳐 다 버리고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호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과정은 복잡했다. 연락하고, 확인하고, 조율하고 결정해야만 하는, 그것도 타이밍을 맞춰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무슨 회로 같았다.
일이 많아지자 다들 예민해졌다. 투닥거렸다. 손발을 못 맞춘다며 지청구를 하고, 네가 좀 하면 되지 않느냐고 비난하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며 억울해했다. 모든 일을 총괄하다시피 하던 언니가 지쳤다. 지인의 예를 들며, ”자손들이 싸울 때쯤 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더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했다.
수술과 입원기간 중에는 작은오빠가 애를 많이도 썼다. 집도 가까운 데다가 퇴직을 한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때 힘을 다 써버렸는지 왠지 시들해진 것 같았다.
아직 일을 하는 큰오빠는 일요일마다 들르겠다고 했다. 차로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 중에 일은 어찌어찌 정리가 되고, 자리가 잡혀갔다.
엄마는 여전히 수술한 사실을 모를 때도 있었지만, 병원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했다.
섬망증세도 점차 사라졌다.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분투奋斗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