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구십팔 세 <4. 이쁜 할머니의 낮밤>

by 지우



이제 6인 병실 구석 자리 침대가 엄마가 몸을 누일 곳이다.

우리는 수술한 병원의 입원일수에 제한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엄마는 한 재활병원에 재입원하게 된다.

부랴부랴 수소문하고, 발품을 판 후에 결정한 병원이었다.


천장 높이에서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커튼 두 장을 여미면 알량한 침실이 되지만, 소리와 냄새까지 막지는 못한다.

답답해서 커튼을 조금 젖히기라도 하면 맞은편 대각선 보호자와 여지없이 눈이 마주치고, 목례를 나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된 엄마를 간호하는 중년의 딸, 나는 마주친 적 없어 두런두런 대화로만 짐작하는 옆 침대 아주머니와 보호자 아들, 부인의 오랜 병치레를 하느라 집도 팔고 병원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는 초로의 남편.

침침하고 비좁은 병실에는 사람도, 사연도 많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도 그랬다.

아픈 몸과, 낯선 공간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설명해 주면, 수술한 것도 그래서 자꾸 엉덩이와 다리가 아픈 것도, 그리고 엄마가 있는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도 잘 이해했다. 하지만 엄마의 의식은 현실의 끈을 종종 놓치곤 했다. 그럴 때면 왜 이렇게 아프냐고 물었고, 여기는 어디인지 궁금해했다.


간병 여사님이랑은 낯이 익었나 보다. 그분 가족 구성을 물어뒀던지 한 번은 면회 간 작은오빠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사 아저씨랑 딸 아들 밥을 사줬다!”

“어, 진짜? 엄마가?”

“그럼! 밥 값으로 오십만 원이나 썼는데.”

평소 만 원 한 장도 쉽게 못 쓰던 엄마의 이런 호기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간병인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을 진심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엄마는 한 마디 말로 무려 오십만 원어치 마음의 빚을 갚았다.

어떤 때는 간호사, 그리고 물리치료사 같은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이 다소곳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손을 부여잡거나 등을 토닥였다. 밝은 인사성과 고운 외모 덕에 ‘이쁜 할머니’라는 별명을 다 얻었다.


우리 사형제는 번갈아 면회를 갔다. 아니면 엄마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상태를 살피고, 죽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안심시켜 주려고 했다. 나는 재활치료를 복습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치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가고는 했다. 말을 걸고, 팔을 들어보라고 시키고, 발목을 까딱 거리거나 다리를 뻗어 보라고 하면 엄마는 내 눈치를 봤다. 딸이 시키니 젖 먹던 힘까지 낸 듯 몇 번 시늉만 하고는 이내 침대에 눕겠다고 했다.

한 번은 복도 벤치에서 엄마랑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나중에야 간호과장님이라고 알게 된 분이 나한테 말했다. “저기, 보호자분. 간병인이 있으니 이렇게 아무 때나 면회를 오시면 안 돼요. 입원할 때 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러고 나서야 나를 제대로 봤는지 “가만있어봐, 어제 왔던 그… 따님이… 아니시네. 다른 분이세요?”라고 묻는다.

면회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가며 병원을 드나들었으니, 찔리는 구석이 있어도 아주 많은 나는 “네, 그건 우리 언니고요, 저는 막내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민망해서 더 활짝 웃으면서.


엄마는 한밤중에 큰소리로 잠꼬대 같은 헛말을 했다. 어딘지 모르는 곳, 낯선 사람들이랑 있는 것이 싫었나 보다. 무서웠나 보다. 섬망.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간병 여사님은 이럴 때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엄마가 안쓰러워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쁜 할머니’의 섬망증세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엄마의 재활은 진전이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빠지지 않고 치료를 받았음에도.

작은 변화도 바로 공유하며, 그것이 걷게 되는 희망의 빛인양 설레어했던 형제 대화방의 대화가 뜸해졌다.

엄마는 다시 걸으려는 뜻이 없었다. 아예 다리에 힘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걷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금요일 연재
이전 03화엄마는 구십팔 세 <3. 의지…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