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까지도, 지금은 마이스터고라 부르는 공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교복과 교련복 왼쪽 소매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표찰을 붙이고 다녔다. 모든 공고가 다 그렇지는 않았고 기계공고, 전자공고 등등 '공업고등학교' 앞에 좀 특별한 이름이 붙은 학교들이었다.
교복 소매에 미싱으로 박은 [조국근대화의 기수] 유래는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기능경기대회장을 방문하여 남긴 '技術人은 祖國近代化의 旗手'라는 친필 휘호에서 시작되었다. 이 붓글씨는 이후 전국의 공업고등학교와 공업단지 조형물에 여러가지 형태로 새겨졌다.
고등학생 교복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를 붙이게 한 어른들은 학생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이 표찰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닐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40년도 더 지난 장면 하나를 잊지 못하는데, 어느 교련 선생님의 수업중 말씀에 어이가 장시간 집을 나갔었다. 내가 살던 K시의 여학생들이 이 마크 붙이고 다니는 남자애들을 선망하고 있다는 요지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구글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라고 쳐 보면 팔뚝에 이것을 달고 다닌 친구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는 뇌피셜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보면 좀 무섭다. 투철한 국가관은 사고(思考)도 기억도 일렬종대 시키나보다. 그렇다고 이 촌스런 마크가 영 '쪽팔린' 것은 아니었고, 어느 쪽이냐면 달고 다니다 보니 그냥 달아야 되나보다 한 정도다. 요즘 마이스터고 아이들에게 이런 표시를 달라고 하면 등교를 거부할 것이다.
[조국근대화의 기수] 마크 아래부분을 보면 글자가 찍힌 파란색 톱니바퀴가 선명하다. 먹는것 외에는 관심 없던 시대라 미적 감각은 눈씻고 봐도 없는 중에 톱니바퀴의 상징성은 굉장히 강조하려 한 것 같다. 기어(gear), 즉 톱니바퀴(cogwheel)는 기계를 직접적으로 상징한다. 기어는 또 기술과 노동,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고 나아가 기계 문명을 나타내는 이미지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울 문래동의 조형물, 경상남도 캐릭터, 이탈리아 국장, 국제 로타리클럽 로고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2018년에 세워진 조형물은 대장간에서 쓰는 모루(anvil) 위에 톱니바퀴가 꽃처럼 피어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문래동은 한국의 유서깊은 기계 마찌꼬바(町工場) 밀집 지역이다. 한국 최대의 기계공업 단지가 위치한 경상남도는 톱니바퀴로 캐릭터를 삼았다. 경남도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세계로 뻗어가는 경상남도의 기상을 나타낸"다고 하며 "경남이는 남인의 기상과 불굴의 의지를, 경이는 맑고 따뜻하고 희망에 가득찬 경남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의 국장(國章)에는 톱니바퀴 문양이 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국장에서도 기어 형상을 볼 수 있다. 물론 노동 또는 노동자를 뜻한다.
1905년에 설립되어 전세계 200여개 나라에 140만 회원이 활약하고 있는 사회 봉사단체 국제 로터리 클럽(Rotary International)의 로고는 마치 도면을 그린듯한 기어 형상이다. 상공인과 전문직으로 이루어진 단체 성격을 나타내는 동시에 클럽의 근로 정신을 표현한다.
나사도 있고 베어링도 있는데 기계 부품 중에서 왜 하필 기어가 기계요소의 대표선수가 되었을까? 기계를 넘어 기술과 노동의 아이콘으로 애용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맞물려 있는 기어 이빨을 1분만 들여다 보자.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발이 보일 것이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오르는 발의 움직임을 그려보라. 기어 이빨이 맞물려 돌아가는 양상이 그대로 투영될 것이다. 지레를 생각해도 좋다. 기어 원리의 설명법으로 종종 채택하는 게 지렛대다. 기어의 중심축을 지레의 지지점으로, 이빨을 지렛대로 생각하면 된다. 도약 또는 지레질이 연속해서 일어나면 둥글게 말려진 상대 톱니를 회전시킬 수 있다.
농부의 발을 동력원으로 하는 펌프, 물자세(무자위) 맞물리는 한쌍의 기어
발로 땅을 박차는 움직임이나 지렛대로 물체를 들어올리는 동작은 인류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바로 노동이다.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노동을 본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세기 3:19)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을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을 시작한 역사의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이 있다. 유발 하라리는 수렵 채집이 영양 섭취나 삶의 질 모든 면에서 농경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 농업혁명을 거대한 사기로 규정한다. 농업 혁명이 일어난 기원전 7000천년 경에 지구 인구는 폭증했는데, 많아진 입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업을 시작했는지 정착과 농경으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농업과 그에 수반되는 노동이 인류의 지긋지긋한 숙명이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신을 상대로 잔머리를 쓴 죄로 끊임없이 바윗돌을 굴리게 된 시지프스의 신화는 역설적으로 노동이 곧 형벌이었던 고대인의 노동관을 보여준다.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예찬하는 프로파간다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절실히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굴레였다. 때문에 육체노동을 대신할 기계의 출현은 폭발적인 반응을 낳았다. 수레 몇대의 짐도 한꺼번에 끌고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는 기계를 사람들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클로드 모네(1840~1926), 아르장퇴유의 철도교 우렁탸게 토하난 汽笛(긔뎍) 소리에
南大門(남대문)을 등디고 떠나 나가서
빨니 부난 바람의 형세 갓흐니
날개 가딘 새라도 못 따르겠네
(최남선이 지은 창가 경부텰도가京釜鐵道歌 1절)
기계에 반드시 들어가면서 동력 전달이라는 핵심 기능을 하는데다가 노동 자체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톱니바퀴라는 부속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기어는 기계를 상징하고 노동을 뜻하는 기호로 일찍부터 채택되었고 기계 문명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도 톱니바퀴 기호로 표현하였다. 한 국가의 문장(紋章)부터 공고생 팔소매의 허접한 표찰에 이르기까지 기어 그림의 쓰임새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그러나 기계가 가져올 미래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장미빛 세계 뿐인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기계 문명의 앞날을 밝게 보지 않았고 톱니바퀴에서 불길한 상징을 느꼈다. 그들이 삐딱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고 현상 이면에서 불편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과 철학의 본질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곳에 가엾은 토끼가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일이니, 이데올로기라는 과녁을 화살에 맞추는 교조주의 입장에서는 매우 못마땅할 것이다. 기계의 불길함을 표현하다 선동가로 찍힌 예술가가 한둘이랴.
찰리 채플린(1889~1977), 영화 <모던 타임즈> 톱니바퀴는 일(work)이라는 이미지 외에 또 다른 속성이 있다. 정확성, 그리고 무조건성이다. 구동측(drive side) 톱니바퀴를 돌리면 맞물리는 피동측(driven side) 기어는 정확히 잇수 비례(gear ratio)만큼의 속도비와 회전수비에 따라 돈다. 구동측 기어가 회전하면 피동측 기어는 절대로 정지하거나 임의의 회전 방향으로 돌 수 없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 속성이 바로 그것이다. 해방된 줄 알았던 노동이 형태만 달리하여 계속되는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단 한개의 구동 축으로부터 동력이 발생하여 거대한 시스템이 한치도 오차 없이 움직인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기계의 움직임에 맞춘 노동은 채찍을 맞으며 노동할 때보다 더 기민해야 하고 쉴 틈도 없다.
찰리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 Jr. 1889~1977)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매카시즘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영국에서 태어난 순 영국인으로, 미국 국적은 한번도 가진 적이 없다. <키드>, <황금광시대>, <시티 라이트> 등의 무성영화들에서 그는 사회를 풍자하고 부자를 조롱하며 가난한 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일찍부터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인 소련을 원조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여 또 한번 '찍혔'으나 그를 결정적으로 공산주의자로 오해받게 한 영화는 1936년작 <모던 타임즈>였다.
영화에서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The tramp)가 길을 가다 어쩌다가 시위대 앞에서 깃발을 흔들게 되는 장면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흑백이라 관객은 알 수 없지만 빨간 깃발로 촬영했으며, 지금이라면 지독한 코미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도 냉전이 시작될 그당시에는 빨갱이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미국 보수층을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모던 타임즈>가 헨리 포드, 그리고 포드가 창안한 생산 시스템인 포디즘(Fordism)을 정조준한 사실이었다.
<모던 타임즈> 극중 사장님. 박스 안의 얼굴은 헨리 포드(1863~1947) 영화에서 떠돌이가 일하는 가상의 회사 Electro Steel의 사장은 사장실에서 노닥거리다 카메라로 현장을 감시하고 작업지시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 사장 얼굴이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를 빼다 박았다. 그리고 영화의 유명한 컨베이어 벨트 장면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대량생산과 작업통제를 근간으로 하는, 날것 그대로의 포드주의(Fordism)다. 포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제국의 역린을 건드린 대형사고였다.
<모던 타임즈> 영화를 보지 않았고 영화 자체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톱니바퀴에 낀 찰리 채플린 그림은 한번이라도 보셨을 것이고 안봤더라도 어딘가 익숙할 것이다. 그것은 이 컷이 무성영화 시대의 명장면인데다 '톱니바퀴에 낀'이라는 수사가 현대 산업사회를 표현하는 일종의 클리셰처럼 이런 저런 매체와 작품에서 수없이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톱니바퀴의 상징성은 노동과 산업사회같은 거대담론이 아니더라도 일상을 다룬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수없이 변주되었다.
시계를 죽임 / 정지용
한밤에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
나의 뇌수를 미신바늘처럼 쫏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뇌수를 비틀어 죽이다.
잔인한 손아귀에 감기는 잔인한 목아지여!
오늘은 열시간 일하였노라.
피로한 이지는 그대로 치차를 돌리다.
나의 생활은 일절 분노를 잊었노라.
유리 안에 설레는 검은 곰인양 하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는 꿈에도 아니 하랸다.
필요하다면 눈물도 제조할뿐!
어쨋던 정각에 꼭 수면하는것이
고상한 무표정이오 한취미로 하노라!
명일!(일자가 아니어도 좋은 영원한 혼례!)
소리없이 옴겨가는 나의 백금체펠린의 유유한 야간항로여!
3연에서 치차(齒車)는 기어 곧 톱니바퀴다. 치차라는 용어는 기계 현장에서도 gear 대신 자주 쓴다. 열시간 일하고 피로한 몸에 째깍 소리가 신경에 거슬려 시계를 강제로 멈추고 잠을 청하는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시인은 내일을 기대하고 비행선의 유유한 비행처럼 잠 속을 유영할 것이다.
- 글이 길어져 2개로 나눕니다. Te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