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

by 송현

삼십대 사내가 고깃집에서 어린 딸과 마주앉아 숯불에 돼지갈비를 구워 먹고 있다. 아빠와 단 둘이 겸상한 딸의 나이는 네 살, 정확히는 생후 37개월이다. 좌식 테이블에 앉은 아이의 턱 높이가 테이블 높이와 비슷하다.

사내는 바쁘다. 딸아이는 배가 몹시 고팠던 듯 밥, 고기, 밥, 고기, 쉴 새 없이 입을 벌린다. 바압~ 하면 젓가락으로 밥을 집어 입에 넣어준다. 젓가락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고기~를 달란다.

밥, 고기, 밥, 고기, 밥.. 그 사이에 사내는 고기를 자르고 자기도 한 점 먹고 입에 소주도 털어 넣어야 한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이 호기심으로 흘긋거리고 있겠지만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 시퀀스가 펼쳐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빌드업이 있었다.

1. 7개월 전, 사내의 직장은 구조조정을 했고 그가 속한 사업부가 공중분해 되었다. 동료들이 뿔뿔이 다른 계열사로 흩어질 때 사내는 희망퇴직을 택했다.

2. 그 겨울에 사내에게는 평생 한번 일어가기도 힘든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다른 곳도 아닌 경남 거제에 10cm가 넘는 눈이 왔다. 사내가 운전하던 엑센트가 눈길에서 반 바퀴를 돌아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보일러 고장으로 이틀 밤 냉방에서 잤다. 경주에서 있었던 처갓집 모임 다음날 장모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3. 사내의 아내가 친정엄마의 간병을 위해 서울로 장기 출장을 갔다.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고 마침 방학이었고 마침 남편이 출근할 곳이 없었다.


집에 남겨진 아빠와 어린 딸의 소꿉놀이는 거의 두 달이나 계속되었다. 엄마는 중간 중간 내려와 며칠 있다 다시 서울로 갔다. 딸은 인근 아파트 1층 어린이집에 다녔다. 아침에 데려다주고 저녁때 데려왔다. 거제라는 섬에서 아이가 섬 그늘 어린이집에 가면 아빠는 홀로 남아 집을 보았다.

아침 세수는 아이 혼자 하는 편이었으나 저녁때 씻는 일과 곱게 단장해주는 일이 예사로 어렵지 않았다. 엄마와는 확연히 다른 손길에 딸은 짜증을 냈다. 눈에 물 들어갔다고 비명을 지르면 씻겨주는 나도 부아가 났다. 우리 아빠는 머리도 안 빗겨준다고, 꼬맹이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다행히 딸 머리가 짧았던 것 같다. 묶을 줄 몰라 쩔쩔매다 아이의 투정을 들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저녁 먹고 나면 아이는 텔레토비도 보고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도 불렀다. 36~7개월 내 딸은 정말 할 얘기가 많은 아이였다. 잠시 혼자 있을라치면 아빠 이것 좀 보세요, 쉴 새 없이 뭔가를 가져왔다. 그림도 그려오고 선그라스 끼고 아빠 앞에서 폼도 잡았다.

다행히도 식사에 어려움은 없었다. 내 딸은 아무거나 잘 먹었다. 두 돌 지날 때쯤 밥반찬으로 마른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었다. 네살박이가 되면서는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싫어한다는 오이나 버섯은 남 얘기였다. 생선회도 먹고 골뱅이와 산낙지까지 잘도 먹었다. 아빠가 차려주는 저녁밥상에 반찬이 무엇이든 딸은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

밥 해먹기도 귀찮은 그날 저녁, 아빠는 딸 손을 잡고 아파트 앞 돼지갈비집에 갔다. 네 살짜리 딸을 술친구 삼아 소주를 마시기 위해서다.

그 고깃집은 우리 세 식구의 단골집이었다. 내 딸은 멸치 고추장에 찍어먹기 전부터 돼지갈비에 맛을 들였다. 돼지갈비는 갈빗살도 아니고 고기의 신선도가 중요하지 않으며 그저 달고 짠 양념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지만 젊은 입맛, 그리고 주머니 가벼운 젊은 가족에게 그만한 외식거리도 없었다.

밥, 고기, 밥, 고기. 아빠와 딸은 돼지갈비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남김없이 입 안에 부어넣었다.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가며, 기운을 차린 딸은 쉬지 않고 재잘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딸을 번쩍 안아들고 있었다.


사람의 기억은 자주 왜곡된다. 뇌 과학자들 말로 기억과 상상의 대뇌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한다. 하나의 기억에 다른 기억들이 혼선처럼 얽혀 엉뚱한 기억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훗날의 강렬한 사건이 원 기억을 덧칠하기도 한다.

거제 살던 시절의 기억은 아련한 봄날이다. 기억이 그림이라면 수채 물감으로 그린 진달래 언덕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글을 누가 읽어도, 실직하고 집에 틀어박힌 삼십대 젊은 가장의 일상이 녹록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회상이 깊어질수록 그 시절을 지나 온지 오래된 내가 느끼는 포근함을 당시의 내가 과연 느끼고 살았을지, 나도 자신이 없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삶의 한 고비를 대표하는 기억은 그 시간을 모두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곤 한다. 그 때를 소환하면 가장 먼저 피어오르는 기억, 그날의 돼지갈비가 삶이 고단할 수 있었던 서른일곱 살의 나를 행복한 사내로 재구성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네 살짜리 딸이 아빠에게 선물해준 보석 같은 시간이 그 겨울, 나아가 내 서른일곱 전체를 아름답게 색칠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일자리를 구해 혼자 창원으로 갔고 엄마와 딸이 거제에 남겨졌다. 그러기를 한 2년, 아내도 학교를 창원으로 옮겨 우리 가족은 거제 생활을 마감했다.

내 딸이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사십대 끝자락의 나는 이번에는 충남 당진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듬해 딸도 거창에 위치한 지역 명문고로 진학했으니, 세 식구가 세 집 살림을 하게 된 셈이다.

그때 쯤, 나이가 들면서 내 딸은 엄마 아빠에게 점차 말수를 줄였다. 여전히 잘 웃고 학교생활 이야기 털어놓긴 했지만, 어렸을 때 하루 종일 지저귀는 새였던 아이가 십대 후반으로 가면서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다무는 날이 많아졌다. 말이 없어져가는 아이를 엄마 아빠는 바라만 보았다.


아빠와 딸이 또 한 번 겸상하여 돼지갈비를 먹을 날이 왔다. 아이의 고2 초여름이었다. 주말에 버스타고 집에 온 딸을 내가 일요일 오후 당진으로 가면서 거창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거창 읍내에 들어선 것이 오후 다섯 시경, 6월이라 아직 대낮이었는데 딸아이가 불쑥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래? 뭐 먹고 싶어?

손님 한명도 없는 고깃집에서 아빠와 고등학생 딸이 마주앉았다. 과묵해진 딸에 아빠라고 다정한 것도 아니어서 마주보고 돼지갈비만 먹었다. 한마디 툭 물어보면 툭 대답했다. 엄마한테는 그래도 말 잘하던데, 차타고 오면서는 그래도 대화 주고받았는데, 그런 생각 하면서 별로 고프지 않은 배에 고기를 채웠던 것 같다.

밥을 먹고 기숙사에 바래다주러 다시 차에 태우고 물어보았다.

"잘 먹었어? 배도 별로 고파 보이지 않던데.”

"그냥 가면 아빠 배 고플거잖아.”


저것이 다 컸네.

또 하나의 소중한 기억이 돼지갈비와 함께 저장되었다.


딸아이는 이제 서른을 바라본다. 거제의 돼지갈비로부터 벌써 24년, 거창의 갈비에서는 11년이나 흘렀다. 따로 살고 있으니 요새 뭘 먹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 적어도 돼지갈비는 아닐 것이다. 아빠가 입에 넣어준 돼지갈비는 기억에 없고 그 때 일을 얘기하면 깔깔 한번 웃고는 내가 얘기한 것조차 잊어버린다. 한 번에 먹는 식사량이 네 살 때 먹던 정도도 안 된다.

녀석과 다시 한 번, 단 둘이 마주앉아 술 한 잔 하고 싶다. 기왕이면 돼지갈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