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라페

by 송현

시작은 당뇨병에 대한 공포였다. 부부가 같이 받은 건강검진에서 나도 아내도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화혈색소 수치를 받았다. 아직 당뇨라 할 수는 없으나 당뇨 전단계라 하는 수치다. 아내는 그날 공복혈당까지 높았다.

연세에 따른 현상일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라는 의사의 조언에도 아내는 즉각 식단을 바꿨다. 중년 여성의 건강 과몰입을 겪어본 분들은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밥에 쌀보다 잡곡이 많아졌다. 내가 싫어하니 남편 밥은 잡곡을 줄여 따로 한다. 부부가 각자 자기 밥을 냉동실에서 꺼내 렌지에 데워 먹게 되었다. 그렇게 먹는 밥이 양조차 현저히 줄었다. 대신, 밥상 위에 채소가 폭증했다.

"골프장이야?”

"탄수화물 먹기 전에 야채 먼저 먹어야 돼.”

밥이나 면, 빵, 기타 탄수화물을 안 먹을 수는 없지만 뱃속에 탄수화물부터 들어가면 혈당이 스파이크를 친단다. 그래서 밥을 먹기 전에 채소를 먹으라는 건데, 그 채소 양이 상당하다. 탄수화물은 또 소화시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곡물이 좋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니 그렇게 알아들었다.

양배추가 매 끼니 올라왔다. 양배추를 생식으로 먹기는 어려우니 땅콩버터로, 들기름과 소금으로, 홀그레인머스타드로 다양하게 버무린다. 거기에 알배추며 오이피클, 데친 브로콜리 따위를 먹다 보면 배가 금세 차오른다. 밥 양은 이것 때문에 줄었다.

당근 라페는 내가 제안했다.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에서 '라페'라는 제목의, 라페보다 더 맛깔나게 쓴 글을 읽고 나도 만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시인은 "마음을 조각낼 수 없으니 대신 당근을 썰고", "라페를 통해 나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왔다"고 했지만 시인의 감성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라페를 만든다.

당근 라페는 당근을 채 썰어 양념에 절인, 샐러드의 일종이다. 라페(râpées)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잘게 썬'이란 뜻이란다. 양배추 라페도 있을 수 있지만 통상 라페라 하면 당근 라페를 말한다.

이 음식을 우리가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한 번에 당근 3개 분량을 담근다. 당근 껍질을 벗기고 필러로 얇게 저민다. 저민 당근을 칼로 썰어 당근 채를 만든다. 칼질을 안 하고 강판을 쓸 수도 있겠으나 그러면 음식을 하는 흥이 나지 않는다. 먹을거리는 모름지기 도마 위에서 또닥또닥 칼질을 해야 음식이 음식다워지는 법이다. 초기에는 필러도 안 쓰고 통당근을 100% 식칼로 썰었다. 내가 깎고 썰고, 칼질하기 까다로운 자투리 당근은 아내가 썬다.

썰어진 당근 채에 소금 1큰술을 뿌리고 뒤섞어 20분 정도 절인다. 소금기에 의해 스며 나온 물을 짜지는 않고 따라내기만 한다. 당근 채는 소금물에 촉촉히 젖어 있다. 여기에 양념 재료들을 한꺼번에 투입하여 버무리기만 하면 된다.

3개 분량의 당근 채에 버무리는 나만의 재료 분량은 다음과 같다.


홀그레인머스타드 1큰술

올리브유 4큰술

식초 2, 레몬즙 1큰술

알룰로스 2큰술

백후추, 건조 파슬리 적당히.


잘 버무린 라페를 밀폐용기에 넣고 냉장고에서 하루 이상 숙성시킨 뒤 조금씩 덜어 먹는다. 쌉싸름하기도 시큼하기도 달콤하기도 한 라페는 식사 전 입맛을 돋우는 전채로 아주 좋다. 아침에 닭가슴살로 샐러드를 만들 때 다른 채소와 같이 넣는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쓰고 반찬 없을 때 밥반찬으로도 손색이 없다.

당근 3개 분량을 나와 아내, 두 식구가 짧으면 일주일, 길면 열흘 동안 먹는다. 다 먹기 하루 이틀 전에 중간 이상 크기의 당근 3개를 꺼내 또 칼질을 한다. 냉장고에 라페가 떨어질 날이 없다.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등의 계기로 식단을 바꿀 수밖에 없다면 보통 식사가 초라해지고 맛없는 음식을 의무감으로 먹어야 할 것이라 상상하기 쉽다. 해 보기 전의 나도 그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설탕을 멀리하고, 탄수화물은 줄이고 단백질을 늘리는 대안식을 찾다 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라페는 시작에 불과했다. 식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성해졌고 새로운 아이템이 계속 발굴되었다. 이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음식들이다.

라따뚜이를 해먹었다. 호박, 가지, 토마토를 썰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와 기타 부재료를 올려 푹 익히는 프랑스 가정식이다.

할인점에서 3리터에 1만 5천 얼마인가 하는 레드와인을 샀다. 그걸 마시려 사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리용이다. 향신료 삼아 조금씩 쓰는 것이 아니고 재료가 잠길 만큼 물 붓듯이 붓는다. 프랑스에서는 물로 삶거나 끓이는 음식을 최하로 치지만 물 대신 와인을 쓰면 최상급 요리가 된다고 한다. 와인으로 뵈프 부르기뇽도 만들고 꼬꼬뱅도 해먹었다. 내가 만든 첫 뵈프 부르기뇽은 어디든 내놓아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돼지수육 할때 물과 레드와인을 반반씩 쓰면 잡내도 잡고 고기 때깔도 곱다.

또띠야에 토핑과 치즈를 얹어 피자를 만들어 먹곤 했는데 또띠야 대신 포두부도 써보고 양배추로 만들기도 했다.

아내는 오늘도 쓸만한 요리 검색을 한다.


처음엔 아직 본격 당뇨도 아닌데 이게 무슨 법석인가 했다. 지금은 어떠냐면, 새로운 맛을 찾는 데 재미 들렸다. 식생활이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을 즐긴다. 먹을수록 건강해진다는, 건강한 기분을 갖는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아내와 나란히 서서 투닥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새 맛을 칭찬해주고, 평가를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이 즐겁다.

원하지 않은 세계에 들어갔을 때, 나태하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황이 어떻게 반전되어도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이나마 찾게 되어있다. 당 수치보다 더한 일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수십 년 마신 술이 쌓여 간질환이 생길 수 있고 혹은 항암식을 먹게 될 수도 있다. 미래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할 수 있는 일은 항암식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재료와 새 맛을 찾으리라는 것이다. 어디 건강 문제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우여곡절이 비슷하다. 때로 참담한 실패도.

어느 날 문득, 그 일이 없었더라면 이 삶도 없었을 것이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손잡고 걸어온 동지애를 느낀다.


이상이 내가 당근 라페를 만들며 펼친 비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돼지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