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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 Sep 08. 2022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철(鐵) 이야기_5

영화 <인생>을 보다가 든 생각

   전편에 이어 계속. 내용에 비해 길기만 했던 글도 이제 끝이 보인다.


   마오쩌둥(1893~1976)은 중국 대륙을 공산화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틀을 닦은 거인이다. 혹자는 그를 중국 역사의 특징이라 할, 지방 세력의 반란으로 왕조를 바꾼 사례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유방의 한나라, 이세민의 당나라, 주원장의 명나라, 홍타이지의 청나라, 짧지만 강렬했던 이자성의 순나라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객관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을 딛고 대륙을 붉은 깃발로 물들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누가 뭐래도 중국 인민이 내려야 하겠으나 우리에게는 수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있는 나라가 몇십년간만이라도 대륙을 앞설 수 있게 해준 분이다.


   대약진운동은 1958년 중국의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이전, 1차 5개년 계획(1953~1957)은 나름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 할 소련의 지원으로, 소련 경제개발을 따라 한 결과였다. 소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스탈린의 독재로 공업화 정책을 펼쳐 괄목할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정작 프롤레타리아는 숱한 수용소군도에서 짜르 지배 하의 농노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했지만 결과만 보면 서구인들이 놀랄만한 경제개발 성과임에 틀림 없다.

   중국이 어느정도 올라오자 만국의 노동자 연대라는 공산주의 정신을 잊은지 오래인 소련은 견제를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지원이 어느날부터 급감했고 중국에 파견된 경제 고문단도 하나씩 철수했다. 게다가 스탈린뒤를 이은 니키타 후르쇼프 서기장은 15년 내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큰소리를 쳐 마오의 염장을 질렀다. 마오가 소련 보란듯이 '우리식', 그리고 공산주의 원칙에 충실한 경제계획을 세운 건 당연히 그래야만 할 일이었다. 다만 그 세부 계획과 정책 집행 과정이 모두 최악이었다.


   농민의 힘을 기반으로 공산 혁명을 성공시킨 마오는 경제 혁명도 농민을 주축으로 삼았다. 그는 경제를 일으키려면 무엇보다 식량 증산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식량 증산을 위해 야심차게 벌인 심경밀식(深耕密植) 농법과 제사해(除四害) 운동은 단 2년만에 중국 농업을 초토화시켰다. 심경밀식이란 벼를 빽빽하게 심고 비료를 때려붓는 농법이었다(그것을 농법이라 할 수 있다면). 화학비료? 그런게 어디 있겠는가. 인분과 퇴비도 모자라자 농민들의 집을 때려부숴 거름을 만들었다. 집단농장은 일터일 뿐만 아니라 공동 생활시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빽빽히 심어 '비료'를 듬뿍 뿌린 벼는 낱알이 여물지 않고 키만 쑥쑥 컸다.

   파리, 모기, 쥐, 그리고 참새를 박멸하자는 제사해운동은 중국 전역에 진풍경을 낳았다. 인민은 사해(四害) 중에 특히 참새 잡이에 열중했는데, 운동 자체를 과시하기로나 그 성과를 보여주기로나 가장 적당한게 참새였기 때문이다. 참새를 잡는 방법도 중국답게 '인구의 힘'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참새가 앉지 못하고 지쳐 떨어질 때가지 밤낮으로 징을 치고 장대를 휘둘렀다.

잡은 참새를 수레에 싣고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중국 전역에서 참새의 씨가 말랐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생태계의 먹이사슬 중 한 마디만 잘못 건드려도 생태계 전체가 흔들린다. 벌레 한 종류만 자취를 감춰도 포식자가 동반 멸종하고 경쟁관계의 다른 벌레와 동물이 이상 번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참새 정도의 종(種)이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불문가지였다. 참새가 낱알도 먹지만 벼에 해로운 벌레도 잡아먹는다는 사실은 농사를 탈탈 말아먹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손가락 때문이라 하는데, 설마 그랬을까?


   식량 증산만큼 야심차게 추진한 철강 증산도 농촌을 휩쓴 쓰나미였다. 전국에 설치된 60만개를 헤아린 토법고로에서 가재도구는 물론 농기구와, 심지어 비싼 예산 들여서 수입한 농기계까지 쇳물로 사라졌다. 할당량 채우기를 닥달해대니 농민은 논밭을 돌볼 시간도 없었다. 석탄은 물론 없고 숯을 구울만큼 한가하지도 못해 생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산이란 산은 순식간에 민둥산이 되었다.


   한가지만 터져도 농촌과 국가경제를 붕괴시킬 대삽질이 한꺼번에 중국에 덮친 결과는 가혹했다.

   1958년부터 4년간 이어진 대약진운동으로 1500만~5500만의 인민이 사망했다. 중국 정부의 인구조사와 각종 통계 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수치라 인용 자료에 따라 편차가 크나, 비밀 문서까지 추적한 <마오의 대기근>의 저자 프랑크 디쾨터(Frank Dikötter)에 의하면 사망자는 최소한 4500만명이 확실한 것 같다. 사망 원인이 대부분 아사(餓死)임은 물론이다.

   그 짧은 기간에 그 지경이 되도록 마오쩌둥을 아무도 제어하지 못했을까? 못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운동에 회의적인 혁명 동지들은 공개 비판을 받았고 자아비판의 수모를 당했다.  홍군의 영웅 펑더화이(彭德懷) 원수는 아얘 쫓겨나버렸다. 지식인들이 침묵한 이유는 이러했다. 앞서 1957년에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이라는 정치운동이 일어났는데, 언로(言路)를 열어 당에 대한 어느정도의 비판을 수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는듯 하자 당은 입을 연 지식인들을 대거 탄압했다.

반우파투쟁 행진. 마오 주석의 격려를 받고 발언한 지식인들은 '우파' 사냥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 마오쩌둥의 중국에는 서구 언론에서 중국병(中國病)이라 조롱한 고질적 병폐가 있었다. 주석이 식량 증산 한마디를 하면 전국에서 전년보다 1.5배, 2배, 3배 수확을 했다는 농민이 속출하는 현상이다. 농촌이 완전히 풍비박산 나는 것이 맨눈으로도 보일 때까지 마오쩌둥은 올라오는 보고를 믿었던 것 같다. 마오 주석이 식량은 그만 되었으니 지력(地力) 보존을 위해 농지를 휴경(休耕)하라는 교시를 내린 것을 보면 틀림 없다. 토법고로에서 나온 철괴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쇳덩어리라도 생산 중량만 집계하면 상당한 증산 실적이 되었을 것이다.


   독재가 나쁜 이유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거나 인권 유린 같은 인문학적 요소도 있지만 실리적 측면에서 봐도 사회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창의력은 고사하고 매뉴얼 지키기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독재다.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초기에는 일사불란한 동원 체제로 잠깐 성과는 나올 수 있지만 어느정도 사회 시스템이 갖춰진 후에는 생산성 향상의 발목을 잡게 마련이다. 그런데, 마오의 독재에 대해 정치인과 관료, 지식인은 그렇다 치고, 당장 현장에서 참상을 겪는 인민이 취한 태도를 보면 독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 얘기는 좀 있다 더 하기로 하고,


   대약진 운동이라는 거대한 삽질에 뜻밖에 엄청난 지식인 한명이 협력을 한다. 1956년, 미국 MIT와 칼텍에서 화려한 연구 경력을 쌓은 한 항공우주공학자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으니, 그가 바로 첸쉐썬(錢學森, 1911~2009) 이다.


   19세기까지 학계에서는 독일어가 20세기의 영어 이상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영어 사용국이 학문적으로 성장한 1920년대까지도 미국은 독일에 비하면 과학 2류 국가였고 지금의 MIT나 칼텍, 버클리가 그 당시는 베를린, 뮌헨, 하이델베르크 대학이었다. 그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미국을 과학기술 1등 국가로 올라서게 한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통이다.


   망명자 중 가장 거물은 말할 것도 없이 1933년 54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날아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었다. 미국, 영국,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가 아인슈타인 영입 경쟁에 나섰으나 세기의 과학자가 선택한 자리는 1만 6천달러의 연봉을 제시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였다. 독일 히틀러 정권은 국가의 적 명단 1번에 아인슈타인을 올렸고 미국 일각에서는 유대인 빨갱이의 망명을 반대하는 '틀딱'들의 고성이 터져나왔다.

   신이 한 세기에 한명쯤 천재를 만들다 귀찮아져서 다 쏟아붓고 내려보냈다는 요한 루트비히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27세이던 1930년에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가 귀국을 포기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천재 폰 노이만(John von Newmann)

   1930년에서 1940년까지 10만여명의 지식인, 수학자, 과학기술자, 예술가들이 독일을 빠져나갔다. 미국과 유럽 각국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독일 탈출 인사들을 돕는 단체가 생겨나고 모금활동이 이어졌다.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화가 막스 에른스트, 작곡가 발터 쇤베르크가 이렇게 자유를 찾아 망명한 사람들이다. 얼마나 고급인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지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까지 이들의 영입에 나서기도 했다. 망명자들 중 세계 최정상급 물리학자만 107명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갔다. 가히 히틀러의 선물이라 할만 했다(<아메리칸 머큐리>라는 잡지의 표현이다).


   히틀러의 선물 중에 1930년에 미국에 망명한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arman, 1881~1963)이라는 헝가리 태생의 수학자이자 학자가 있었다. 역시 유대계인 그는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유체역학의 아인슈타인이라 평가되는 루트비히 프란틀(Ludwig Prandtl, 1875~1953) 밑에서 수학했었다. 기계공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구기 스포츠에 정통한 분들은 들어보셨을 카르만 와류(Karman Vortex) 현상을 정리한 카르만이 그사람이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교수로 재직하던 폰 카르만의 박사과정생 중에 1935년 미 정부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 유학와서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26세의 중국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첸쉐썬이다. 첸은 1939년 박사 학위를 받는다. 칼텍에서도 수학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여러모로 폰 카르만의 수제자라 할만한 인물이었다. 폰 카르만이 칼텍-NASA 제트추진 연구소를 이끌게 되었을 때도 핵심 멤버였고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미 육군 장교 신분으로 카르만과 함께 베를린으로 날아가 독일의 항공기술 현황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 첸쉐썬을 이번에는 미국이 중국에 선물하고야 만다.

왼쪽부터 프란틀, 첸, 카르만. 이 세사람이 한 프레임에 찍힌 자체가 역사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광란은 과학계라고 가만 놓아주지 않았다. 불과 몇년 전(1949) 공산화 된데다가 한국전으로 적국이 된 중국도 미국의 신경을 긁은것 같다. 중국의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고 석박사 과정 시절 마르크스 읽기 모임참여했었던 첸쉐썬을 미 정보당국은 공산주의자에 중국 스파이라고 확신했다. 종신계약이던 칼텍 교수 자리에서 쫓겨나진 않았으나 비밀 취급 인가를 박탈당한 첸쉐썬은 차라리 중국에 가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출국금지, 가택연금, 도청, 사찰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탄압이 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치자 첸쉐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이 상황을 지켜보지 않을 리 없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들과  첸쉐썬을 맞교환 하자고 제안했고, 미국 정부는 내부 격론 끝에 결국 중국의 제안을 수락하고 첸 일가를 송환했다. 미국에 유학중인 중국 과학도 200명까지, 1+200 패키지였다. 중국으로 간 첸쉐썬은 그 뒤로 죽을 때까지 미국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다.


   첸쉐썬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예우와 지원은 파격 이상이었다. 돈과 사람을 무제한으로 지원하면서 연구 성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첸쉐썬의 활약도 눈부심 이상이었다. 귀국 4년만에 최초의 미사일을 쏘아 올렸고 그로부터 4년 뒤 사정거리 1200km급 미사일을 자체 개발했다. 1970년에는 드디어 세계에서 5번째로 인공위성을 자체 로켓으로 우주에 올린 나라가 되었다. 유능한 연구자가 꼭 유능한 리더가 되는 건 아닌데 첸쉐썬은 관리에도 후진 양성에도 탁월했던 것 같다. 핵은 그의 전공 분야가 아닌데도 연구 프로젝트 운영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개발을 성공시켰다. 핵잠수함 개발에도 관여하고 그러는 중에서도 각급 학교 과학기술 교육 체계까지도 정립하는 등, 현대 중국을 저개발 농업국에서 첨단기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킨 제 1 공신이 첸쉐썬이다.


   거기까지는 위인전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는 사뭇 아스트랄하다. 필요 이상으로 권력의 편에 선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우파 척결운동,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까지 매번 마오쩌둥을 지지했으며 나중 1989년 천안문 사태 때는 자국민에게 기관총을 난사한 공산당 정부를 적극 옹호하기도 했다.

   대약진 운동의 오작품인 심경밀식이 사실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벼 식모 간격을 줄이면 소출이 증가하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고, 미국 대학 교수에다 수학의 달인인 첸 박사의 머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마오쩌둥은 이를 즉각 채택했다. 농대에서도 수학을 하긴 하겠지만 벼가 수학적으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말을 듣는 유일한 인물로서 첸쉐썬이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역사가 좀 바뀌었을까? 1962년, 수천만의 인민을 굶겨 죽인 대약진 운동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마오쩌둥은 주석직은 유지한 채 2선으로 물러났다. 이 장면에서 중국의 저력, 그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나는데 첫째, 마오는 누구 한명 방패막이 세우지 않고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5년 뒤 더 큰 사고를 치며 컴백하긴 했지만 물러날 당시에는 흔한 실무자 마녀사냥 따위 없었다. 둘째, 마오와 찰떡궁합이었던 첸쉐썬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류사오치도, 덩샤오핑도 그에게는 최고의 예우를 보장했다. 세째, 중국 인민 역시, 한점 티끌도 없는 순결함을 사랑하는 한국 민중과 달리 첸쉐썬의 과오를 묻지 않았다.

후진타오 주석의 병문안을 받고 있는 말년의 첸쉐썬


   끝으로, 아까 하다 만 이야기. 지식인들은 그렇다 치고, 인민은 왜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대약진 운동을 받아들였을까? 저항이 있기는 분명히 있었다. 분노한 농민들이 지역 인민위원회를 때려부수기도 했고 홍콩 접경 지역에서는 굶주림을 참다 못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농민도 많았다. 한 촌로는 마오 주석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지금 벌어지는 삽질을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의 소란이 대세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인민은 당의 명령에 순응했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운동에 앞장섰다. 여인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토법고로 불속에 던져넣었다.

   심성이 선량하여 인간의 약함과 비이성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은 이를 공포라고 해석한다. 공포에 대한 합리화 기제로 지배자가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약진 운동에 입만 대면 숙청 당하는 상황을 눈으로 보면 누구나 공포를 느낄만 하다. 하지만 파편화된 개인들이라면 모르되 대중에게 공포의 약발이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내 옆에 누군가가 있고 임계점을 넘은 고통이 지속된다면 공포를 누를만한 에너지가 솟아오를 수밖에 없다.

   <마오의 대기근>에서 프랑크 디쾨터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첫째, 인민은 너무 허약해져 봉기는 고사하고 옆동네에 걸어갈 기운조차 없었다. 둘째, 중국 인민의 오랜 미신, 즉 "황제는 자애로우나 그 신하들은 부패할 수 있다"는 믿음, "마오 주석이 현실을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체제를 위협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눈 앞의 현실과 언론에서 떠드는 화려한 성과의 괴리를 중국 인민은 희망으로 메꾸었다.


   이 시기를 전하는 중국인의 입은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은 살만 했다고 말한다.

   "이치대로라면 나는 옛날에 죽었어야 해. 전쟁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유독 나만 안 죽었잖소. 그건 내가 매일같이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고 속으로 주문을 건 덕분이지." (위화, <인생>, 백원담 譯 p183)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지. 나라 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네. 우리는 모두 대장의 말을 들었고 대장은 상부의 말을 들었지. 상부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런가보다 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네." (같은 책 p.210)



   

   첫 글, 한 세편 정도 생각했는데 사설을 붙이다 보니 길어졌다. 생략한 사설을 다 붙였으면 더 길어졌을 것이다. 내용 뿐 아니라 형식도 문체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고 글 자체가 브런치 전체 분위기와는 판이하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쓰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 쓸수록 쓸 말이 늘어가는게 나만 느끼는 것일까?



참고문헌


- 余華, [인생], 백원담 역, 푸른숲, 2007

- 네이버영화 [인생],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6531"

- 日本製鐵 홈페이지, "https://www.nipponsteel.com"

- 포스코 홈페이지, "https://www.posco.co.kr"

- 신상목,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뿌리와이파리, 2017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20

- 최성락, [말하지 않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15

- Robert C. Allen, [세계경제사], 이강국 역, 교유서가, 2017

- 창원시청 홈페이지, "https://www.changwon.go.kr"

- 김주완·김훤주, [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http://100in.tistory.com/3462"

- Daniel Loxton, [왜 사람들은 아직도 이상한 것을 믿는가], 장영재 역, SKEPTIC Vol.28

- Wikipedia, [Henry Bessemer], "en.wikipedia.org/wiki/Henry_Bessemer"

- Adam Thiele, [Smelting experiments in the early medieval fajszi-type bloomery and the metallurgy of iron bloom], Periodica Polytechnica-Mechanical Engineering, 2010

- Yaxiong Liu 外, [Iron decaburisation techniques in the eastern Guanzhong Plain, China, duting Late Warring States period : an investigation based on slag inclusion analysis], Archaeological and Anthropological Sciences, 2015

- Science Direct Topic, [Electric Arc Furnace],  "http://www.sciencedirect.com/topics/engineering/electric-arc-furnace-process"

- Peter Watson, [생각의 역사2 – 20세기 지성사], 이광일 역, 들녘, 2009

- Peter Watson, [컨버전스], 이광일 역, 책과함께, 2016

- 민태기, [판타 레이], 사이언스북스, 2021

- Frank Dikötter, [마오의 대기근], 최파일 역, 열린책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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