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사극이 뭐가 있을까? 3년을 걸친 대하사극 <용의 눈물>, 이병훈 PD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허준>과 <대장금>, 스타일리시한 퓨전 사극의 시작을 알렸던 <추노>, 논픽션 같은 퓨전 사극의 정점을 보여줬던 <바람의 화원>과 <뿌리 깊은 나무>까지.
그 후로 대한민국 사극들은 트렌드 해지고 젊어지면서,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 안에 점점 더 화려해지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극이라고 부르기 힘든 작품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흥행과 별개로 그 진정성은 한 없이 하찮아 보였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채널,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보면서 진정성 가득한 여러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가끔은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왜 요즘의 사극은 이런 드라마들처럼 진정성 있게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라고....... 그리고 그 물음에 <옷소매 붉은 끝동>이 제대로 대답해 준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자신의 삶은 지키고자 한 궁녀 덕임과 이를 사랑한 영조 이산의 애절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이제는 제법 지루할 법도 한 영,정조 시대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의 주체는 임금이 아닌 이를 지켜보는 궁녀라는 데에서 큰 차이점을 두고 있다. 덕임과 궁녀들의 시선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의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너무나 뻔하고 반복적인 이야기를 이토록 다르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를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성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의빈성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로맨스는 그 흔한 사극에서 보여줬던 로맨스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수직적 관계로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임금 이산과 그를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자신의 삶을 더 우선시하며 밀쳐내는 덕임의 관계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형성된 두 인물의 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향한 믿음과 신뢰를 부각시키면서, 느리지만 천천히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형성하게 한다. 중전을 등장시키지도 않고, 그 흔한 삼각관계없이도 드라마 후반부까지 이러한 상대적인 로맨스가 극의 중심을 이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건 이토록 상대적인 로맨스와 두 주인공의 감정들을 전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디테일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서사가 배우들의 열연과 놀라운 극본을 만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정점에선 로맨스 사극을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최근 그 어떤 사극보다도 진정성 있게 작품을 다루고 있다. 호칭부터 머리모양, 그리고 복장까지 고증에 신경 쓴 디테일이 우선적으로 눈에 띈다. 흔들림 없이 보여주는 군왕의 위엄이나 아늑하면서도 기품 있는 조명과 세트 미술, 그리고 잔잔한 음악까지. 그 어느 하나 사극으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분명 장르는 실존인물을 활용한 픽션 사극이지만, 그 어떤 정통 사극보다도 더 논픽션 사극 같았던 진정성과 디테일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봐 지는 것들이 바로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해석과 심리 묘사이다. 그저 역사책에서 다루듯이 표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인물들이 어떠한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지를 심도 있게 다루고 보여준다. 냉혹하지만 뜨거운 애정이 살아 숨 쉬는 영조부터 원망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 버텼을 이산의 마음을 진정성 있게 다루고 묘사해 낸다. 다양한 사건들 속에 휘말리는 역사적 인물들의 심적인 상태와 고통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기존 사극과는 다른 공감대를 형성해 낸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이토록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현시대를 관통하는 여성상을 덕임을 통해서 완벽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끝까지 임금을 거절하는 모습에서, 결혼과 육아대신 개인적인 삶에 만족하려 하는 현시대의 여성 아니 지금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실제 의빈성씨가 오직 주체적인 삶 때문에 그토록 승은을 거절하진 않았겠지만, 이 작품은 자연스럽게 결혼과 여성의 삶이라는 부분을 연결시키면서 많은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결국 의빈이라는 삶을 선택한 덕임의 짧은 행복과 슬픈 인생은 여러 생각과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자 이제 연기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영조의 이덕화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영조 중 가장 역사에 부합했다고 생각했던 캐릭터는 영화 <사도>에서 보여준 송강호의 영조였다. 이덕화는 좀 더 매정하면서도 애증에 가득한 극단적인 영조를 연기해 낸다. 무엇보다 놀라운 발성과 제스처로 극을 좌지우지하는 연기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자신의 아들마저 죽이는 군왕으로서의 위엄과 세손을 지켜내는 따스한 할아버지의 마음까지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또 하나의 놀라운 영조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홍덕로를 연기한 강훈은 처음 보는 배우인데, 상당히 안정적인 연기로 대배우들의 사이에서 본인의 얼굴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박지영의 카리스마와 깊이 있는 연기는 제주 상궁이라는 캐릭터가 그저 빌런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였으며, 장희진의 차분하면서도 냉소적인 연기는 중전에 너무나 이상적인 캐스팅이었다. 유일한 코믹 요소지만 적은 분량에도 극을 맛깔나게 살린 오대환과 장혜진의 연기도 좋았고, 각기 다른 캐릭터로 완벽한 화합을 보여준 덕임의 동무들인 이민지, 하율리, 이은샘도 좋았다.
첫회를 보는 순간 이준호의 발성과 딕션에 상당히 놀랐었다. 올해 본 사극들의 주인공들과 전혀 다른 묵직함과 울림 있는 발성에, 그저 감성 연기만 되다면 최고의 캐릭터가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언제 버려질지 모를 두려움과 그럼에도 자신을 지켜주는 할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감정부터, 덕임과 홍덕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슬픔까지. 이 복잡하고도 입체적인 이산이라는 캐릭터를 마치 이산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연기해 낸다. 분명 장담하건대 앞으로 이준호는 사극 연기의 이정표가 될 것이며, 사극을 도전하는 모든 젊은 남자 배우들은 이준호와 비교가 될 것이다.
누구보다 이 작품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배우가 이세영이다. <왕이 된 남자>부터 뭔가 기존의 틀을 깨부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젠 그녀의 연기가 어마 무시해졌다. 아역 때부터 늘 따라다녔던 박신혜와의 비교에서 이젠 연기로는 무시 못 할 정도의 배우가 된 거 같다. 특히 발성과 딕션이 너무 좋으며,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와 열정의 대단함이 화면 밖에서도 느껴진다. 끝도 없는 미궁의 늪 속에 빠져버린 캐릭터를 너무나 설득력 있게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 2021년의 여주인공들이라 부를 수 있는 몇몇의 배우들과 나란히 설 수 있는 명연기였다고 생각한다. 극찬을 아끼고 싶지 않은 연기였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극찬만 했지만 분명 단점들도 보이는 작품이다. 초반 두 주인공의 뻔한 클리셰 장면들과 다소 부담스러웠던 광한궁의 이야기, 너무나 임금을 수평적으로 대했던 덕임의 행동들이 조금은 불편했었다. 또한 <홍천기>와 <연모>에 비교해 임팩트가 떨어졌던 OST와 막판 무리한 방영 편성과 시간 분배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옷소매 붉은 끝동>은 원작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 있는 해석과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스태프들의 노력이 합쳐져서 역사에 남을 역대급 사극을 탄생시켰다. 퓨전 사극과 판타지 사극이 넘쳐나는 지금, 대중들이 어떤 사극을 원하는지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었다. 진정성 하나만으로 보여준 이 작품의 깊이와 이에 호응한 대중들의 모습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느리지만 촘촘하게 감정의 서사와 디테일을 다루는 그 진정성에 너무나 황홀한 경험을 했다. 과거인지 꿈인지 아니면 죽음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들의 사랑했던 순간을 영원처럼 만든 엔딩도 그저 완벽했다.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적인 해였던 2021년의 진정한 피날레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었다.
20년대 좋은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