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트렁크> 리뷰
공유와 서현진이라는 뜻밖의 조합과 드라마신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김규태 감독의 연출, 여기에 아낌없는 제작비를 투자해 주는 넷플릭스까지. 이 신선한 조합에 기간제 결혼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이야기하는 로맨스 스릴러 드라마 <트렁크>는 분명 놓칠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다. 신선한 소재만큼이나 제법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늘 리뷰하는 <트렁크>이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트렁크>는 이혼한 아내가 1년짜리 기간제 결혼이라는 서비스 프로그램을 전 남편에게 권유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스 스릴러 드라마이다. 계약 결혼 서비스라는 소재부터 이러한 프로그램을 이혼한 남편에게 소개한다는 설정 자체가 파격적이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로 오락적인 재미만을 추구하진 않는다.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는 외로움을 담보로 잡혀있는 수많은 인물들의 구속과 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결혼과 부모에 대한 상처, 결혼 직전 행방불명된 애인에 대한 상처와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상처까지. 온갖 상처들 속에서 외로움에 허덕이는 인물들이 그러한 상처들을 감추기 위해 계약 결혼이라는 서비스에 구속되고 피폐해져 간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기간제 결혼한 두 남녀가 조금씩 진짜 결혼이 되어간다는 뻔한 멜로를 그리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구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구속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마치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진정한 결혼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이 작품은 스릴러 요소를 집어넣어 범인 찾기라는 또 다른 재미를 부여한다. 트렁크와 함께 발견된 시신을 시작부터 보여주면서, 후반부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이야기 속에 상기시킨다. 노인지(서현진)를 스토킹 하는 엄태성과 한정원(공유)을 스토킹 하는 전부인 이서연. 결국 노인지와 한정원이 각각의 스토킹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범인 찾기와 연결되면서, 이들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이야기로 확대된다.
이 작품의 제목이 '계약 결혼'이 아니고 '트렁크'인 것은 계약 결혼 프로그램에 구속되어 정착 없이 떠도는 노인지를 그려내는 매개체가 다름 아닌 트렁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정원의 트렁크도 죄책감과 외로움으로 이서연에게 붙잡혀있는 집착의 매개체로 연결된다. 결국 호숫가에 덩그러니 트렁크만 떠올랐다는 것은 누군가는 이 괴로운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청자들은 그러한 해방 과정을 스릴러스러운 재미와 함께 쫓아가는 것이다.
이전부터 미장센에 온 힘을 다했던 김규태 감독답게 이번 작품도 훌륭한 미장센을 선보인다. 다양한 조형물의 패턴과 조형미를 가지고 정교하게 다듬은 비주얼은 이번 작품의 키 비주얼로 읽힌다. 상류층 사회를 그리는 디테일도 기존 드라마와 수준을 달리하며, <마인>과 <작은 아씨들>이후 가장 화려하게 그들의 삶을 비주얼적으로 담아낸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과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와 함께 올해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음악과 이를 활용한 음악 편집도 이 작품의 남다른 완성도에 일조한다.
사실 공유와 서현진에게는 늘 바라는 그들만의 연기 포인트가 있다. 공유 특유의 능글미와 서현진의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정폭의 연기. 하지만 <트렁크>에서 공유와 서현진에게 이러한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연기적인 도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면증과 약에 취해 피폐해져 가면서도 조금씩 어둠을 걷어내는 연기를 입체적으로 그린 공유와 톡 쏘는 날카로움에 <왜 오수재인가>의 냉혈한에서 한 꺼풀 벗겨낸 여유로움까지 내포한 서현진의 연기는 확실히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사실 두 주인공의 캐릭터 공감대가 이 작품의 호불호를 담당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어쨌든 그들의 연기로 절반의 성공은 이뤄낸다.
그동안 작은 역할로 얼굴을 알렸던 정윤하는 이서연이라는 광적인 스토커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이번 작품으로 확실한 눈도장을 찍는다. 커리어 우먼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중성적인 미모와 특유의 뭉그러지는 발성, 그리고 묘한 살 떨림을 그려내는 표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이서연이라는 캐릭터를 나름 설득력 있게 연기해 낸다.
앞서 말한 캐릭터의 공감대 부분이다. 독특한 소재에 심지어 스릴러 요소까지 넣다 보니, 인물들의 서사가 매끄럽지 않고 캐릭터의 행동들이 공감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사랑하기 때문에 구속하고 스토킹 한다는 이서연의 캐릭터가 쉽게 공감되지 않아, 이 작품이 시작부터 애매하게 읽히는 부분이 있다. 스토커 엄태성의 서사도 부족해서, 왜 그가 하이라이트의 중심에 서는지도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행히 앞서 말했듯이 배우들의 호연으로 캐릭터들의 개연성 없는 행동들이 어느 정도 설득된다.
형사들의 시간대를 그린 이중 플롯도 다소 어색해서 몰입에 방해를 준다. 스릴러 요소를 그리는 이러한 플롯이 크게 어색하진 않았지만, 종종 불편한 편집 때문에 가뜩이나 몰입하기 힘든 캐릭터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끊어 놓는다. 심지어 이 작품의 결말이 생각보다 평이하기에 이러한 이중 플롯의 장치가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명암이 분명했던 플롯 활용이었다.
<트렁크>는 기간제 결혼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외로움을 담보 삼은 구속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해방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결혼 제도에 대한 질문과 결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지만, 사실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육아와 낙태 문제부터 스토킹과 가스라이팅, 동성애에 마약 문제 그리고 가정폭력까지. 그 많은 이야기들이 어색하지 않게 기간제 계약 결혼이라는 소재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이다. 문제는 이러한 독특한 소재를 담아내는 인물들의 서사가 제대로 공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좀 더 매끄러운 서사로 공감대를 그려냈다면 좋았을 텐데, 스릴러 요소까지 첨부하면서 단편적인 서사들이 난해한 캐릭터들의 몰입을 더욱 방해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매력과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버텨보기엔 공감이란 부분에서 호불호가 상당할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20년대 좋은 국내 드라마들을 리뷰합니다.
위 글은 블로그에 썼던 리뷰들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