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핑계는 이제 그만
이번 주은 고등학생 둘째의 시험 기간이다. 보통 학원에서는 시험 직전 보강, 일명 '직보'라고 하여 시험 전날 아이들을 학원에 오게 해서 마지막 정리를 함께 한다. 오늘이 영어시험이라 어제 하교 후 점심 먹고 쉬었다가 직보 하러 갔다. 저녁식사 준비를 마치고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아 언제 오냐고 문자를 보냈다. 수업은 두세 시간 만에 끝났는데 자습실에서 마저 공부를 하고 온다는 답이 왔다. 시험기간 중에 그나마 공부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내심 기쁘기는 했지만 저녁때를 놓치니 걱정이 되었다.
8시 반 무렵 집으로 온다는 문자를 보내와서 남편은 아이 마중을 나갔고 나는 저녁상을 차렸다. 식탁에 딸과 함께 앉아서 밥 먹는 걸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친구들도 있었어?"시험 범위가 많니?" " 좋아하는 과목이라 힘든 줄 모르고 공부한 거야?" 둘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주 짧게 대답했다. 시험 범위가 많아서 공부할 분량이 많다며 식사 후에도 좀 더 봐야 한다고 했다. 힘내서 차근차근하자고 다독였다.
벌써 고등학교 가서 두 번째 시험을 치르지만 그간의 둘째와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많이 설레는 모습이 보였다.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날 기대로 입학을 기다렸지만 코로나로 입학식은 미뤄졌고 온라인 입학식, 수업으로 이어졌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데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니 시무룩해지고 생활 패턴도 불규칙해졌다. 공부 분량이나 깊이가 중학교 때와는 다를 텐데 학교 수행평가나 과제 준비는 알아서 챙기는 듯 보였지만 종종 방문을 잠그고 있어서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첫째에 비하면 둘째는 우리 집에서 엔지니어라 부를 만큼 디지털 기기를 잘 다룬다. 아이패드, 노트북, 스마트폰을 넘나들며 가족 중에 뭐가 안된다고 얘기하면 어디서 찾아봤는지 금세 해결한다. 수시로 음악을 듣고 중3 겨울방학 내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정주행은 물론 본인이 보고 싶은 영화를 끝도 없이 보았다. 중학교 졸업식 후 뜬금없이 스마트폰을 폴더폰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첫째도 고등학생 시절 스마트폰을 반납하고 3년 내내 폴더폰으로 지냈기에 인제 정신 차리고 공부하려나 싶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이패드로 카톡을 하고 폴더폰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저장하고 듣는다. 며칠 전에는 수행평가를 위해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다시 부활시켰다. 책상에는 폴더폰, 스마트폰, 아이패트, 노트북. 디지털 기기 천국이다.
많은 시간을 디지털 기기에 할애하는 것 같아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온라인 수업까지 들으니 하루 종일 둘째가 디지털 기기에 노출되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 같이 느껴졌다. 급기야 이번 시험기간을 보내며 처음으로 둘째에게 시험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필요하면 디지털 기기를 거실에 꺼내놓자고 말했다.
디지털 기기 사용에 대해 부모인 나 역시 절제가 안되는데 아이에게만 현명하게 하라고 말할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노트북, 아이패드를 오가며 보내는 아이를 볼 때마다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답답했다.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시간 동안 이용하는 지혜를 나도 아이도 터득할 수 있을까?
자기 결정 이론은 아이에게 심리적 필수 영양소가 부족할 때 스크린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불건전한 행동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 원인을 무조건 디지털 기기에서 찾을 게 아니라 왜 어떤 아이들은 애초에 딴짓에 더 날 넘어가는지 알아야 한다고 본다.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이 충분치 않을 때 아이는 딴짓에서 심리적 영양소를 찾으려 한다. <초집중> 6부 아이를 초집중자로 키우는 법 p233
책 <초집중>의 저자는 아이의 행동 아래 감춰진 진실을 들여다보고 근본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야족의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이가 가장 잘 안다고 믿으며 아이가 원할 때만 목표가 달성된다고 굳게 믿는다"라고 한다. 반면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정규 교육은 아이에게 선택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환경과는 정반대의 특성을 띤다는 것이다. 아이가 집중력에 대한 '지배력 상실'에 익숙해져 딴짓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생활보다 입시를 위한 교육이 진행되다 보니 둘째의 심리적인 상태도 내재적 동기를 유발하기가 쉽사리 생기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계속되는 수행평가나 과제 준비, 학원 과제 등으로 자유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디지털 기기에서 본인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에 대해 선택함으로써 그나마 잠시라도 여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매번 아이가 오랫동안 디지털 기기 앞에 있을 때 딱히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하기보다 식사를 하면서 우회적으로 "엄마는 현명하게 이용할 거라 믿어. 엄마도 잘 안되기는 하지만 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말고 한 후에 아이패드나 노트북으로 자유를 만끽하길 바라"라고 말한다. 자율성을 키우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데 정말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을지 솔직히 확신이 안 선다.
고등학생이 되고 코로나 여파로 친한 친구들과도 줌을 통해 간혹 수다를 떨기는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만나 얼굴을 보며 신나게 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에서 음악을 듣거나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체재를 찾을만하다. 관계에서 얻는 만족감이 충족되지 않으니 딴짓이 결핍을 채울 수밖에. 디지털 기기를 너무 많이 사용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둘째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텐데. 나 역시 딴짓을 다스리기 위해 인제 서야 타임 박스형 일정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하루 일정에 디지털 기기 사용에 대한 시간을 따로 할애해 두어 실천해보고 있다. 잠자기 30분 전에는 디지털 기기를 끄려 노력 중이다. 아이의 변화를 바란다면 나부터 달라져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우리는 자녀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 줄 수 없고 그러려고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심리적 욕구라는 측면에서 아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일단 기술 남용의 진짜 원인이 뭔지 알아야 아이가 딴짓으로 불편에서 도피하려고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힘을 기르게 도와줄 수 있다. 아이도 부모님에게 이해받는다는 기분이 들면 시간을 선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것이다. <초집중> 6부 아이를 초집중자로 키우는 법 p240-241
저자는 아이가 딴짓을 잘 다스릴 수 있게 하려면 기술보다 사람에 관한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 지금 내 행동이 나한테 이로운 걸까?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떳떳한가?라고 생각해보라고 권해보라고 한다. 나에게도 필요한 질문이다. 가뜩이나 요즘 고등학생 딸과 대화가 쉽지 않다고 느꼈는데 저자는 몇 가지 유용한 팁을 알려주었다.
1. 대화할 때 비판하지 말고 경청하기: 학교 공부를 하는 게 가치관에 부합하는가? 같은 질문 던지기
2. 공부, 가족이나 친구와의 대화, 디지털 기기와 시간 보내기 등에 얼마씩 시간을 쓰고 싶은지 묻고 의견 존중하기: 자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은 아이에게 선물이며 가끔 실패할 때도 있지만 실패도 학습과정이다.
3. 친구나 부모님과 함께 노는 시간 많아지게 하기
무엇보다 솔직하게 아이와 대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매일 머리를 굴리며 아이의 속내를 체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면 허심탄회하게 엄마도 조금씩 변화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둘째와도 함께 규칙을 정하자고 제안해 보려 한다. 시도하고 실패도 경험하면서 나도 아이도 스스로 행동을 점검하고 시간과 집중력을 관리하는 법을 터득할 때가 오길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기술이 우리 삶에 점점 깊이 침투해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디지털 제품이 애초부터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도록 만들어졌다고 가르쳐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딴짓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시간을 현명하게 쓰는 건 그들의 의무이자 권리다. <초집중> 6부 아이를 초집중자로 키우는 법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