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물리학 2
"잠시 쉬어가도, 달라도, 평범해도 괜찮아! 모든 것이 괜찮은 청춘들의 아주 특별한 사계절 이야기"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소개말이다. 남편과 사회생활을 한참 하던 어느 주말, 마음의 안정과 힐링을 주는 영상미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이 영화를 만났다.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혜원(김태리)은 평범함 회사원으로 살다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류준열), 시골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고 평범한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은숙(진기주)을 만난다. 이들 친구 세명은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면서 사계절을 보내면서 각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는 줄거리다.
알고 보니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었다. 책 <관계의 물리학>에서도 저자는 모리 준이치 감독이 영상미를 살려 만든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영화를 영혼이 허기질 때마다 꺼내 먹는다. '먹는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영화가 '수고로 빚은 정직한 한 끼'에 관한 영화라서 그렇다. 고모리라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귀향한 이치코는 자신을 위해 정성껏 요리하고 정갈하게 차려 소박한 한 끼를 먹는다. 내가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이치코가 음식을 차려놓고 먹기 전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이타다키마스!' 하고 감사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관계의 물리학> p74
첫째가 태어나고 산후조리 후 워킹맘으로 바쁘게 지낼 때 아이들 고모가 <비빔툰>이라는 만화를 선물했다. 정보통과 생활미 부부가 연애하고 결혼해서 초보 부모를 거쳐 두 아이의 부모가 되는 생활을 다룬 홍승우 작가의 책이었다. 육아를 시작한 우리 부부가 퇴근 후나 주말에 서로 돌려가며 읽었는데 초보 부모의 심정을 너무나 잘 묘사해서 서로 만화의 장면을 나누기도 했던 재미와 공감, 감동을 주었던 책이다.
부모가 되고 아이가 자라고 말을 배우면서 아이 교육을 위해서 음식에 대하 감사 인사를 하는 법을 보여주려고 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부모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에 두 아이 모두 자연스레 배웠다. 첫째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고 어느 날 음식을 차려준 나에게 배꼽손을 하고 "잘 먹겠습니다."를 씩씩하게 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둘째가 태어나고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아직은 서투른 수저 사용에 밥그릇에 미처 세심하게 뜨지 못한 탓에 밥풀 몇 톨이 남았다. 식사 후 언니의 감사 인사 후에 둘째도 큰소리로 "잠 먹음다(=잘 먹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동생을 바라보던 첫째는 "농부들이 피 땀 흘려 농사지은 건데 그렇게 남기면 어떡해"라며 동생에게 한마디 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언니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에 와 안겼던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비빔툰을 첫째와 함께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책에서 오빠인 다운이가 밥을 흘린 여동생 겨운이에게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농부 아저씨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건데 남기면 어떡하냐는 내용이었다. 그걸 그대로 따라 한 거였다. 남편도 그 내용을 알았기에 다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8945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고마움과 가장 많은 관계성을 포괄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잘 먹겠습니다!"라는 뭉근하고 우묵하고 질박하다. 어떤 따스하고 그리운 관계를 눈앞에 떠올리게 만든다. "잘 먹겠습니다!"의 숙연한 경의 안에는 사랑합니다과 고맙습니다의 숭고함도 함께 담겨 있다. 또 당신으로 하여 "나의 생명을 얻습니다."라는 근원적인 감사의 마음도 깃들여 있다. <관계의 물리학> p76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음식은 첫째를 출산하기 전날 시어머님이 해 주신 점심 식사다. 내가 좋아하는 생선과 나물을 준비해 주셨는데 보이지만 않았지 어머님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겨서인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가정을 이루고 가끔씩 친정이나 시댁에 내려가서 양가 어머님의 정성스레 차려준 밥상을 대할 때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릇 안에 담긴 음식의 재료들인 채소와 곡식을 땀 흘려 가꾸고 수확한 노고에, 그리고 정성 들여 자식들을 위해 요리한 두 분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관계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한다면, 그 순서는 지금 당장의 친밀한 거리가 아니라 그간의 삶에 투여된 애정과 축적된 시간의 무게여야 하지 않을까 <관계의 물리학> p77
며칠 전 시아버님이 병원 검진차 집에 오셨다. 1박 2일 일정으로 오셨는데 배낭을 메고 오셨다. 도착하시자마자 가방에서 뭔가를 계속 꺼내셨다. 김장김치 두 포기, 어머님이 직접 만든 깻잎장아찌, 텃밭에 직접 농사지은 가지, 애호박, 시장에서 사서 손질한 전복 등 봉투 봉투 가방 한가득이었다. 아버님 옷가지, 세면도구는 따로 쇼핑백에 넣어 오셨다. 저녁상을 봐드리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진심을 담아 "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의 크고 애정 어린 마음 씀씀이에 감사한 날이었다.
오늘 당신과 가장 오래된 관계의 질량을 가진 어머니가 당신에게 차려준 음식을 먹기 전 " 잘 먹겠습니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 냄새나는 말을 빠뜨렸다면 새봄이 와도 두릅순 초무침이나 머위 꽃봉오리 튀김을 먹을 자격이 당신에게는 아예 없다고 해도 서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크고 환한 사랑은 잘 감각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없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물리학> p77